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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욕야카르타 원칙의 국제적 영향력 증대
    욕야카르타 원칙은 국가 대표성을 지닌 사람들이 채택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NGO와 관계 전문가들이 만든 것이기에 당연히 국제규범으로서의 지위와 효력을 갖지 않는다. 더구나 이 전문가 집단도 유엔이 공식적으로 구성한 것이 아니었다.

     

    이처럼 법적 구속력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원칙은 국제인권법의 여러 조문을 매우 그럴듯하게 잘 편집한 덕택에 두루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2007년 이를 법원에 제시하면서 제3의 성을 법적으로 인정받은 네팔 트랜스젠더 운동가의 사례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또한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위원회」는 2009년 일반논평 20(차별금지)에서 성적 지향과 젠더 정체성을 차별금지사유의 하나로 명시하면서 이 원칙을 언급한 바 있다.
     

    이와 같이 유엔이나 각국 정부 및 법원, 비영리민간단체들이 젠더 퀴어 관련 문제에서 이를 참조·인용함에 따라, 욕야카르타 원칙은 국제적으로 상당한 수준의 공신력을 가진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 이유는, 욕야카르타 원칙에 서명한 사람들이 유엔에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거나 인권 분야에 실무적·학문적으로 상당히 영향력이 있는 개인이나 단체들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전(前) 아일랜드 대통령이며 초대 유엔인권고등판무관인 메리 로빈슨(Mary Robinson), 10명 이상의 유엔특별보고관 또는 유엔조약위원회의 구성원, 다수의 법학 교수와 법관 등이 이 문서에 서명했다. 이런 배경 가운데 욕야카르타 원칙을 제네바에서 발표한 자들은 UN인권이사회와 UN인권고등판무관 등에게 이 원칙을 보증하고 나아가 유엔 인권 활동의 모든 영역에서 받아들일 것을 촉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요컨대, 욕야카르타 원칙은 처음에 전문가 집단의 선언에 불과하였으나, 점차 여러 국제적 기구나 국가 기관 등이 이를 인용·원용함에 따라 점차 국제적인 존재감을 가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다소 억지같이 보였던 내용들이 여러 협약, 판례 등을 통해 점차 타당성을 가진 것으로 여겨진 것이다.


    욕야카르타 원칙의 세계적 활용 사례

    오늘날 많은 NGO들이 이 원칙을 내세우면서 인권 활동을 하고 있다. 활동가들은 이 원칙에서 제시된 상세한 국가의무를 통하여 정책 개선의 아이디어를 얻고, 이를 토대로 자국 내에서 법제와 정책을 변화시키려고 한다. 2017년 4월 방콕에서 욕야카르타 원칙 10년을 평가하는 국제회의가 개최되었다. 지난 10년간 아·태지역의 25개 국가 및 지역에서 젠더 퀴어의 평등 증진을 위한 보호법 및 조례들이 도입되고, 젠더 퀴어 친화적인 판결이 내려졌으며, 심지어 개헌절차가 이뤄지기도 하였다는 평가가 내려졌다.

    욕야카르타 원칙을 세계적으로 활용한 사례를 잘 보여주는 문서가 바로 「욕야카르타 원칙에 대한 활동가 가이드」이다. 이 가이드 제3부에서 16개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각 사례에서 욕야카르타 원칙의 관련 규정이 적절히 원용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① 젠더 퀴어에 친화적이지 않은 법 기준의 변경 사례: 각종 신분 증명서에 제3성의 성(Other, O)을 표기할 것을 명령한 대법원 판결을 받아낸 네팔 사례(2007년), 합의에 따른 성인 동성 간 성행위를 처벌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온 인도 형법 제377조의 위헌성을 법원 판결로 이끌어낸 인도 사례(2009년), 젠더 전환을 위해 요구하였던 생식불능수술(surgical sterilization) 요건을 폐지하겠다는 정부 측 답변을 이끌어낸 네덜란드 사례(2009년) 등이 소개되고 있다.

    ② 새로운 정책 개발의 사례: 트랜스젠더에게 신분증명서에 기재된 법적 이름 대신에 자신이 선호한 사회적 이름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한 브라질 사례, 젠더 퀴어의 권리와 연계하여 국제적 개발협력 계획을 수립하고 이행한 스웨덴 사례, 지방 정부 차원에서 젠더 퀴어를 위한 정책을 수립하고 시설을 마련한 콜롬비아 사례 등이 소개되고 있다.

    ③ 젠더 퀴어의 필요에 민감한(responsive) 정부를 지향하는 사례: 트랜스젠더에 대한 차별금지를 인권문제로 부각하고 이에 상응한 국가인권기구의 역할을 강조한 뉴질랜드 사례, 트랜스젠더의 인권·개인개발·사회적 통합에 힘쓰는 운동을 통하여 보건담당자들의 인식을 제고하는 데 성과를 거둔 칠레 사례, 경찰공무원과 검찰직원 등을 대상으로 젠더 교육을 효과적으로 실시한 베네수엘라 사례 등이 있다.

    ④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 교육의 사례: 동성애자 교사를 강단에서 배제할 것인가에 관한 논쟁이 제기될 때 언론을 통해 젠더 퀴어의 보호 필요성을 적극 홍보한 가이아나 사례, 성적 지향 등에 의하여 입게 된 피해사례를 수집하여 지역·국가 나아가 국제 차원에서 그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호응을 이끌어낸 인도 사례, 욕야카르타 원칙을 내용으로 만든 포스터 전시회를 개최하여 이를 널리 알린 폴란드 사례 등이 있다.

    ⑤ 젠더 퀴어의 권익 보호를 주창(主唱)하는 운동을 일으킨 사례: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레바논의 사례가 소개되고 있다. 이 사례에서, 권익 보호 운동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지지자를 모으고, 젠더 퀴어 개개인의 권리의식을 강화하며, 피해사례를 파악하고 알림으로써 이를 공동체의 우선순위 관심사로 만드는 일을 잘해야 함을 강조한다.


    욕야카르타 원칙의 문제점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욕야카르타 원칙은 자칭 전문가라 하는 소수 그룹의 견해에 불과하며 국제법적 구속력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모양으로 인용·활용됨에 따라 점차 나름대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이 원칙에 대한 보다 엄격한 검토가 요구된다. 이하에서는 욕야카르타 원칙이 적용되는 경우에 나타날 수 있는 문제점들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1) 부모 권위와 가족제도의 훼손
    욕야카르타 원칙은 아동이 특정한 성적 지향이나 젠더 정체성을 스스로 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으며(원칙 13 B 참조), 때로는 이로 말미암아 가족의 반대에 직면하게 됨으로써 사회보장을 위한 국가의 개입이 요구됨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래서 원칙 15 D는 가족으로부터 거절당한 아동과 청년에게 성적 지향 및 젠더 정체성과 관련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사회보장 프로그램을 마련할 필요가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가족을 포함한 모든 생활영역에서 성적 지향을 이유로 한 폭력 등에 대하여 적절한 형벌을 과하는 법률을 제정할 것을 요구한다(원칙 5 B 참조). 그런데 이 경우 폭력의 의미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성적 문제를 일으킨 자녀에 대한 가정에서의 훈계(예컨대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때리는 것)가 처벌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나아가 부모가 자신의 가치관을 가르치고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자녀를 훈육하는 권리가 부인된다. 원칙 16 D는 교육방법과 과정, 교재가 다양한 성적 지향과 젠더 정체성에 대한 인식과 존중을 제고하는데 도움이 될 것을 요구한다. 반면에 기존의 ‘차별적 태도’를 고칠 수 있는 ‘교육과 훈련’을 언급하기도 한다(원칙 2 F). 이외에도 학령기 아동의 부모는 공립 및 사립학교에서 동성애자·트랜스젠더 교사의 존재를 거부할 수 없게 된다(원칙 16 A, E 및 원칙 12 A).


    더 나아가 원칙 3은 결혼이나 부모의 지위로 말미암아 자신이 선택한 젠더 정체성을 인정받는 것이 방해를 받아서는 아니 된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자녀가 젠더 정체성을 선택하는 것을 부모가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젠더전환수술(性재지정수술)을 거치지 않고도 젠더의 변경이 가능함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지금까지 아버지와 남편이었던 사람이 젠더 정체성이 달라졌음을 이유로 자신의 종전 법적 지위를 부정할 수 있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가족제도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결과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

    또한 상속과 건강보험 등에서 동성애 커플의 권리를 종전 가족과 동일하게 인정함으로써(원칙 3 A 및 원칙 17 H), 혈연을 바탕으로 한 가족관계의 근간이 흔들리게 된다.

    위와 같이 욕야카르타 원칙은 부모의 권위 및 가족관계를 근본적으로 훼손함으로써 가족이 “사회의 자연적이고 기본적인 단위이며 사회와 국가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한 세계인권선언 제16조 제3항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2) 표현의 자유에 대한 침해

    원칙 19 D는 “공공질서와 공중도덕, 공중보건, 공공안보라는 개념이 성적 지향과 젠더 정체성의 다양성을 지지하는 의견과 표현의 자유를 행사하는 것을 차별하는 방식으로 제한하는 데 사용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젠더 퀴어를 옹호하는 표현의 자유가 공공질서와 공중도덕·공중보건·공공안보에 비하여 더 중시되어야 함을 요구한다.

    원칙 19 E는 “의견과 표현의 자유가 다양한 성적 지향과 젠더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의 권리와 자유를 침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바로 이 규정으로 말미암아 동성 간 성행위의 도덕적 문제점을 지적하는 반대 의견이 억압받을 수 있다. 즉 ‘혐오표현’이라는 이름으로 다수의 도덕적·학문적·신앙적 표현을 억제하려는 것이다. 이는 다수의 자유를 억압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예컨대 동성 간 성행위를 금지하는 성경에 관한 토론에서 혐오표현을 한 것으로 고발된 스웨덴의 목사에 대한 기소사건을 들 수 있다​1). 이 사건은 세계인권선언 제19조에서 규정하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3) 종교의 자유에 대한 침해
    원칙 21은 “국가는 성적 지향 및 젠더 정체성을 이유로 법의 평등한 보호를 거부하거나 차별하는 법, 정책 또는 관행을 정당화하는 데 이러한 권리[사상, 양심, 종교의 자유]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함으로써 노골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다. 더 나아가 원칙 21 B는 “성적 지향 및 젠더 정체성의 쟁점에 관한 다양한 의견, 신념 및 믿음을 표현·실행·증진하는 것이 인권에 부합하지 않은 방식으로 이뤄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규정함으로써 동성애에 대한 반대의사의 표명이 젠더 퀴어의 인권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하더라도 젠더 퀴어의 권리를 보장하는 범위 내에서만 허용되어야 한다. 예컨대, 국가는 예배당에서 동성간 결혼식을 거행하는 것을 거부하는 종교적 관행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이처럼 종교적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욕야카르타 원칙은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세계인권선언 제18조​2)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나아가 종교기관 및 단체의 도덕적 판단을 금지함으로써 정교분리의 원칙이 훼손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4) 국가 주권에 대한 침해
    욕야카르타 원칙은 특히 차별금지와 관련하여 국가로 하여금 동성애 친화적인 법규범을 정립하고 이에 따라 해석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원칙 2 A는 성적 지향 및 젠더 정체성을 금지사유로 한 차별금지원칙을 헌법이나 법률 등에 명시적으로 포함시키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해석론으로 이를 포함시킬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러한 차별금지 관련 규범이 실효적으로 이행될 것을 요구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입법에 의하여 뒷받침이 되지 않을 경우 사법부나 행정부에 의한 법해석으로 말미암아 성적 지향 및 젠더 정체성을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시키라는 것이다. 입법권의 행사는 국가의 개별적 상황과 사정에 따라 존중되어야 할 주권적 사항임에도 불구하고, 욕야카르타 원칙은 이러한 점을 무시하고 입법에 나설 것을 요구할 뿐 아니라 사법부와 행정부의 법해석으로도 이를 관철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국제법상 국가주권원리뿐 아니라 국내법상 민주적 원리에 따른 국가운영을 무시하는 태도라고 하겠다.
     

    (5) 건강하지 못한 선택의 강요
    욕야카르타 원칙의 전반적인 전제는 동성애 행위나 젠더전환수술 등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라는 점이다. 동성애 행위나 젠더전환수술이 갖는 의학적·보건적·심리학적 문제점을 간과하거나 일부러 무시하면서, 자유 또는 권리라는 이름으로 이를 규범적으로 옹호하고 있다.

    더 나아가 개인적인 건강 문제 이상으로 사회적 문제가 야기되고 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동성커플의 입양 문제이다. 원칙 24 C는 입양과 관련하여 ‘아동의 최선의 이익’(best interest of the child)이 최우선 고려사항이 되어야 한다고 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최선의 이익을 판단함에 있어서 동성커플의 성적 지향 및 젠더 정체성이 이와 부합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동성결혼 부부에게 입양을 허용하는 것이 아동에게 최선의 이익이 아님은 많은 연구에서 인정되고 있다.


    맺는말

    젠더 퀴어도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인권의 향유자임에는 분명하다. 우리의 헌법이나 국제인권법에서도 이러한 점은 마땅히 인정되고 있다. 따라서 젠더 퀴어의 인권 존중은 국가법질서에 의하여 준수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에 따라 동성간 성행위를 하는 것이 권리이므로 이를 제한해서는 아니 된다는 주장이나, 동성간 가족관계의 형성을 당연한 권리로 요구할 수 있다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고 본다. 젠더 퀴어의 인권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과 성적 지향에 따른 비이성애적 성행위가 인권이라는 것은 전혀 다른 주장이다. 동성간 성행위를 자유의 범주에 속한다고 보아 허용할 것인가, 또는 허용한다고 할 때 그 범위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는 국가별로 국민적 합의에 의하여 결정되는 사항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이를 헌법적 설명으로 부연하자면, 관점에 따라 동성간 성행위가 일정한 자유나 권리(예컨대 사생활의 자유, 일반적 행동자유권 등)에 해당된다고 보더라도, 질서유지나 공공복리를 위하여 법률로 제한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국가별로 상이할 수 밖에 없는 사항을 무시한 채, 동성간 성행위의 자유나 동성간 결혼의 자유를 보편적인 인권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無理)이며 억지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욕야카르타 원칙을 국제법적 규범으로서 또한 국내법에 당연히 수용되어야 법규범으로 간주하는 것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고 본다.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의 금지를 넘어서 젠더 퀴어에 대한 국가적 보호 및 지원을 권리화, 즉 법제화하는 것은 매우 신중한 판단이 필요한 사항이다. 이는 젠더 퀴어에 대한 국가의 역할을 새롭게 규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젠더 퀴어에 대한 배려, 또는 그 이상의 우대조치를 통하여 특별한 지위를 보장하는 등의 새로운 과제를 국가가 떠맡게 된다. 따라서 젠더 퀴어에 대한 법제화는 국가 공동체의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이뤄질 사안이지, 국제적 추세나 국제기구의 압력으로 밀어붙일 일이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젠더 퀴어에 대한 국가적 보호를 법제화하고, 이를 반대하는 행위나 표현을 금지하고 심지어 처벌하는 것은 자칫 「동성애독재」(LGBT dictatorship)로 흐를 수 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오늘날 욕야카르타 원칙이 국제적으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이 현실이므로, 이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만약 그 주장에 나름 근거가 있다면, 이에 상응한 대응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주장에 오류가 있거나 부당한 점이 있다면, 분명히 이를 지적하며 그 문제점을 밝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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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선필 교수
    서울대에서 법학박사학위를취득하였고, 한국입법학회장,한국헌법학회 부회장, 한국공법학회 부회장을 역임하였다.현재 홍익대 법대 학장으로 봉직하면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자문위원, 국회 입법지원위원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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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ttp://www.becketfund.org/index.php/case/93.html?PHPSESSID=c1324d0ad95ef409ea3f010819e060cf.

    2) 모든 사람은 사상의 자유, 양심의 자유, 그리고 종교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이러한 권리에는 자신의 종교 또는 신앙을 바꿀 자유도 포함된다.
        또한 이러한 권리에는 혼자 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개적으로 또는 사적으로, 자신의 종교나 신앙을 가르치고 실천하고 예배드리고 엄수할 자유가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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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퀴어신학의 태동과 기독교 신학계에 끼친 폐해

    필자가 젠더 이데올로기(gender ideology)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면서 내린 결론은, 지난 원고들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젠더 이데올로기의 발흥으로 인류 문명사에 대재앙이 도래했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젠더 이데올로기가 음란하고 패역한 성혁명(sexual revolution)으로 이 세상을 성애화(性愛化)시킴으로써 타락과 패륜을 확산시키고, 이성애에 기반한 일부일처제(一夫一妻制)를 파괴하고 성소수자들(LGBTQIA)의 폴리 아모리(polyamory, 복수연애·다자성애)를 옹호함으로써 가정을 해체시키며,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정면으로 도전하는 반신론적·무신론적 시대사조로서 기독교계를 타락시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젠더 이데올로기가 특히 신학계에 끼친 심각한 폐해가 주목할 만한데, 그것은 바로 친(親)동성애적인 퀴어 이론(queer theory)을 발판으로 퀴어신학(queer theology)이라는 이단적인 신학 분파가 태동한 일이다. 퀴어신학은 모든 만물이 유전(流轉)한다고 주장하는 후기 현대적 생성의 철학에 근거하여 인간의 성(性)도 남성이나 여성으로 고정되지 않고, 양성이 자유롭게 유동(流動)한다는 사상의 기반 아래 절대적 진리를 해체시키는 해체주의적 세계관·인간관이 가세하여 만들어낸 신학 사조이다​1).

    특별히 퀴어신학은 낯설고 이상함을 뜻하는 ‘퀴어’(queer)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정통 신학에서 낯설고 이상한 것, 괴기하고 비정상적인 것으로 배제되어 변두리로 밀려났던 테마를 신학의 중심에 내세우고 이를 억압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신학적 근거를 마련하고자 한다. 여기서 낯설고 이상한 것은 동성애를 전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퀴어신학은 생소하고 괴이한 대상으로 문제시되어 왔던 동성애를 신학적으로 정당화하고, 비정상적인 동성혼을 정상화하는 데 종국적 목적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동성애 및 동성혼의 신학적 정당화와 기독교 전통의 부정
    동성애 및 동성혼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퀴어신학자들은 보수주의 성경학자들의 문자주의적 성경해석을 통해 동성애가 죄악시되었다고 비판하면서 성경에 기록된 동성애를 역사 비평적으로 재해석한다. 퀴어신학의 대부이자 로마가톨릭 신부요, 철학자·심리학자인 다니엘 헬미니악(D. A. Helminiak)은 성경이 동성애를 단죄할 어떤 진정한 근거도 제시하지 않음으로써, 동성애에 관한 한 중립적 견해를 취한다고 시종일관 강변한다​2).

    시카고 신학교의 퀴어신학자 테오도르 제닝스(T. W. Jennings) 또한 동성애에 대한 기독교의 전통적 관점이 왜곡되었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그러면서 그는 다수의 성경 텍스트들이 동성애 관계와 행위를 긍정함은 물론 찬양까지 한다고 주장하면서 동성애라는 것이 저주도 아니고 범죄도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선물이라고 결론짓는다​3). 심지어 동성과 가까워지려는 욕망이 축하받을 만한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이라는 퀴어신학자들의 주장도 나오는 상황이다.

    퀴어신학자들은 동성애 및 동성혼이 죄악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격론을 벌이기도 한다. 특히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가 동성애를 한 번도 질책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성애가 죄악이 아니라고 역설한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주장인데, 일례로 만약 예수께서 언급하지 않은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단정한다면, 같은 논리로 우리는 그가 침묵했던 다른 불의한 행동(예: 근친상간)도 그에게 중요하지 않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인지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동성애가 심각한 죄악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가 동성애에 대해 논쟁하지 않은 것이 결코 아닌 것이다.

    예수께서 동성애를 거론하지 않은 이유는 다음과 같이 추정할 수 있다: 1. 구약의 동성애 정죄에 대한 율법적 교리에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복음서에서 동성애에 관해 재차 언급하지 않은 것이며, 2. 이방 문화와 달리 성에 관해 매우 보수적이고 일찍이 동성애에 대해 엄격한 교육이 이뤄졌던 1세기 팔레스타인의 유대 문화에서 동성애가 큰 사회문제로 드러난 적이 없기 때문이며, 3.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고대 유대인 사회가 성에 대해 드러내놓고 말하기를 꺼리는 폐쇄적 사회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동성애와 같은 패역한 행위에 대해 직접적 언명을 피했다고 볼 수 있다.


    퀴어신학자들의 성경인물에 대한 왜곡과 음란한 성경해석
    퀴어신학자들은 동성애가 죄악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성경 안에 동성애자들이 많다고 유추하면서 그 사례를 구체적으로 열거한다. 그들이 기본 텍스트로 채택하는 헬미니악의 『성서가 말하는 동성애: 신이 허락하고 인간이 금지한 사랑』은 다윗과 요나단(삼상 18:1, 20:20; 삼하 1:26)의 우정을 위시하여 다윗과 사울(삼상 16:21)의 관계 역시 연인관계로 묘사한다(요나단-다윗-사울의 게이 삼각관계). 또한, 룻과 나오미(룻 4:16)의 관계를 문학작품에 최초로 등장한 레즈비언 로맨스로 추정하고, 다니엘과 환관장도 동성애 관계였을 가능성을 언급한다. 예수께 병든 하인을 고쳐달라고 청원했던 백부장과 종(마 8:5-13)의 관계 역시 동성애 관계라고 주장한다​4).

    퀴어신학자들은 성경의 거의 모든 인물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여 훨씬 더 많이 동성애에 개방적이었을 거라는 무모한 주장도 제기한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들이 참람하게도 하나님마저 동성애자로 만들어버린 사실이다. 테오도르 제닝스는 그의 저서 『예수가 사랑한 남자: 신약성서의 동성애 이야기』에서 예수와 어떤 ‘사랑받던 제자’(나사로·부자청년·안드레·요한 등으로 추정) 사이가 동성애 관계였을 개연성을 제기하면서 소위 ‘게이적 성서 읽기’를 시도한다. ‘사랑받던 제자’가 예수의 품에 안겨있는 육체적 친밀함에서 평범한 사제지간이 아닌 동성 간에 육체관계를 나누는 모습이 엿보인다는 것이다(요 13:21-26). 제닝스는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실 때 옷을 벗은 상태였고 제자들이 예수께 바짝 기대었던 것은 성애 관계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5),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은 예수가 여자의 역할을 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6).

    지면에 싣기에 대단히 민망하지만, 사태를 냉정하게 직시하기 위해 반드시 지적해야 할 내용이 있다. 이는 곧 동정녀 마리아가 낳은 아기 예수가 남성으로부터 물질적 요소(남성성)를 전혀 물려받지 않고 여성인 마리아로부터만 자양분을 받았으므로, 예수의 몸이 ‘자웅동체’(雌雄同體)라는 주장이다. 이에 예수께서 상황에 따라 남성도 되었다가 여성도 되었다가 유동적으로 바뀌는데, 십자가상에서 창으로 옆구리가 찔린 상처에 대한 해석이 망령되기 이를 데 없다. 그들은 예수의 옆구리 상처를 여성의 몸으로 변화되신 자궁으로 해석하면서, 외부 상처는 여성 성기의 외음부이고, 피와 물은 애액이라는 것이다​7). 또한, 로마가톨릭에서 행해지는 예수의 상처에 수녀들이 입맞추는 의식은 여성화되신 그리스도의 몸과 동성애적으로 구강 성교하는 의식이라는 것이다​8).

    퀴어신학자들은 하나님이 남근(男根)을 지닌 남신(男神)으로서 신자들과 성애(性愛)를 나누는 신이라는 참으로 해괴망측하기 이를 데 없는 신성모독적인 주장도 서슴지 않는다. 제라드 롤린(G. Laughlin)은 에스겔 1:27(“그 허리 아래의 모양도 불같아서 사방으로 광채가 나며...”)를 하나님의 성기를 우회적으로 표현한 본문으로 보며, 16:8(“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고...”)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남성들과 성관계한 것으로 해석한다​9). 그뿐만 아니라 제라르 와드(G. Ward)는 요한복음 20:17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대화하고 그를 붙들려고 시도한 행동을 남성의 입장에 서신 예수님과 마리아가 이성애적 사랑을 주고받은 사건으로 보며, 27절에서 도마가 예수님의 옆구리 상처에 손을 넣는 사건을 여성의 입장에 서서 도마와 더불어 동성애적 사랑을 주고받은 사건으로 해석하기도 한다​10).

    우리는 퀴어신학자들의 성경해석을 보면서 그들이 과연 어떤 마음가짐으로 성경을 읽는지를 간파할 수 있다. 그들에게는 우정과 동성애 사이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아서 모든 친밀한 관계는 다 동성애 관계로 간주하는 경향이다. 음란의 프레임에 갇힌 상태에서 성경을 해석하니까 모든 것을 음란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는 의구심도 든다. 그런데 퀴어신학자들은 성경의 다수 인물들을 동성애자로 간주하는 한편으로, 명백히 동성애를 죄악으로 단정한 성경구절들에 대해선 왜곡된 해석이라고 강변하기도 한다. 구약과 신약에는 동성애를 직간접적으로 언급한 구절들(창 19:1-11; 레 18:22; 20:13; 신 23:17-18; 삿 19:16-30; 겔 16;48-50; 롬 1:24-27; 고전 6:9-10; 딤전 1:10; 유 1:7)이 나오는데, 퀴어신학자들은 그동안 보수주의 성경학자들이 이 구절들을 잘못 해석하면서 이성애만을 하나님의 창조질서로 바라보고(이성애 중심적) 동성애를 죄악으로 정죄(동성애 혐오적)해 왔다고 비판한다.

    위의 성구들에 대해 퀴어신학자들이 재해석한 내용을 살펴보노라면, 대단히 어리석은 궤변과 비논리적인 억지주장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데, 그들은 성경 전체를 문맥에 따라 읽으면 충분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내용도 막무가내로 왜곡시키는 오류를 범한다. 특히 ‘소돔과 고모라 사건’(창 19장)이 명약관화하게 동성애와 관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전적으로 부정한다. 즉 이 사건이 이방인 약자를 대상으로 집단 강간을 저지른 불법을 지적한 것일 뿐만 아니라, 동성애자들에 대한 인류의 범죄를 정당화하는 데 악용되어왔다고 역공격하는 식이다. 과거엔 동성애자들이 자연적 순리에 위배되는 자신들의 부끄러운 행동을 은폐하기에 급급했지만, 오늘날엔 이미 공공연하게 드러난 동성애자들의 비윤리적 행태보다 이성애자들의 혐오가 훨씬 더 심각하다면서 비난의 화살을 오히려 이성애자들에게 돌림으로써 논점을 흐리기도 한다.


    이성애에 기반한 전통적 결혼 및 가족질서에 대한 비판
    퀴어신학자들은 동성애에 대한 이성애자들의 혐오를 비판하는 강도보다 훨씬 더 강한 어조로 이성애와 극심한 대립각을 세운다. 특히 그들은 성애와 생식(임신 및 출산)을 관련시키는 이성애 중심주의가 전통 기독교적 성윤리라는 괴물을 만들었다면서 이것이 동성애 혐오의 뿌리라고 맹렬하게 비난한다. 그러면서 퀴어신학자들은 동성애를 적극적으로 미화하는 만큼 이성애에 기반을 둔 결혼과 가족질서에 강한 적대감을 드러냄으로써 결혼과 가족적 가치에 근본적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특히 제닝스는 복음서에서 예수가 명백히 성적인 규범을 벗어난 일탈에 대해 크게 문제의식을 갖지 않았던 사람, 성적으로 부정한 행위에 충격을 받지 않고 책망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관대한 태도를 보였던 사람이라면서 성 일탈에 개의치 말고 살 것을 넌지시 암시하기도 한다​11). 이처럼 제닝스의 결혼 및 가족적 가치를 폄하하고 성규범을 괘념치 않는 비윤리적인 방종은 성경에 기반한 기독교적 윤리관에 전적으로 배치되는데, 왜냐하면 성경이 독려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가족생활 중심의 성결한 삶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기독교계에서 제닝스의 신성모독적인 성경해석과 건전한 기독교 윤리를 위협하는 심각한 도전에 대해 별다른 문제 제기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기독교의 소멸’을 공공연하게 논하는 상황은 더이상 묵과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시사한다. 15차례나 방한한 바 있는 제닝스가 2018년 8월 한국에서 했던 강연(본래 감신대에서 강연이 예정되었으나 많은 반대로 평화교회연구소로 변경) 제목은 놀랍게도 “기독교 이후 신학”(Post-Christian Theology)이었다​12). 그렇다면 제닝스는 왜 기독교 이후의 신학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일까?

    20세기 중반 서구세계에서는 기독교가 쇠퇴할 거라는 예단 속에서 ‘신 죽음의 신학’(死神神學, Death of God Theology)이라는 극단적 신학사조가 출현하여 기독교 신앙을 위협했었다. 그런데 주창자는 다름 아닌 제닝스의 스승 토마스 알타이저(Th. Altizer)였다. 제닝스는 한때 존재했던 하나님이 더이상 실존하지 않기 때문에 기독교가 소멸할 세속 사회가 도래할 거라고 공언함으로써 그의 스승보다 한층 더 급진적으로 나아갔다. 거룩보다 쾌락, 성결보다 방종을 선택한 퀴어신학자들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족쇄처럼 부담스러운 존재이기에 이들이 ‘기독교가 사라질 그 이후’를 동경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수순인 듯하다.


    퀴어신학에 대한 이단 결의의 당위성
    사실상 퀴어신학은 신학이라 명명하기엔 너무나 부적절하고 치명적인 문제점을 내포한다. 퀴어신학은 창조질서로서의 양성(兩性) 질서를 주신 하나님의 섭리에 어긋나는 동성애에 천착함으로써 명백히 모든 시대의 인간을 향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탐구하는 기독교 신학의 본질에서 빗나가는 오류를 범한다. 또한 퀴어신학은 반(反)인륜적·비(非)도덕적일 뿐 아니라 괴기스럽고 이상한 성적 관행인 동성애를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데 주력함으로써 신학의 보편적 주제와 부합할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퀴어신학은 하나님의 거룩한 신성을 모독함으로써 성령 훼방죄에 상응하는 죄악을 범한다.

    그동안 한국 기독교계에서는 퀴어신학의 이단성에 대한 학문적 연구와 논의가 지지부진했었다. 하지만 이제 퀴어신학의 이단 결의 문제는 더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는 위기 국면에 접어들었으므로 위중한 문제의식 속에서 퀴어신학의 이단성을 규명해야 할 것이다. 퀴어신학의 성경해석은 모든 이단의 성경해석 방식처럼 성경구절을 자의적이고 임의대로 자신들의 주장에 꿰어 맞추는데, 즉 자신들이 원하는 성경구절만 끌어내어 억지해석을 하는 행태는 퀴어신학이 다른 이단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특별히 퀴어신학이 다른 이단보다 죄질이 훨씬 더 악한 것은, 성결한 하나님의 말씀을 음란한 인간의 말로 치환시킬 뿐만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음란한 잡신으로 전락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게이로 가정하고 성경의 근본을 뿌리째 뒤흔드는 참람한 신학을 이단적이라고 정죄할 수 없다면, 과연 어떤 신학을 이단으로 정죄할 수 있으며 대관절 이단 판정 기준을 어떻게 정할 수 있겠는지 심각하게 고민할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와 관련된 핵심교리를 왜곡시키는 것이 바로 이단일진대, 퀴어신학은 이단으로 정죄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2006년 영국에서 발행된 『퀴어 성서 주석』(Queer Bible Commentary)의 한국어 번역이 종결되어 현재 출판을 앞두고 있는데, 이 주석은 성경 66권을 모두 동성애적 관점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성경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훼손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퀴어 주석 한글판이 보급되어 퀴어적 해석이 일반화되면, 성경적 윤리관에 대한 강한 충돌과 혼란으로 이어질 위험성이 매우 농후할 뿐만 아니라, 성경적 가치관을 지키려는 교회와 성도들이 사회적·문화적·제도적으로 공격당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더욱이 미래 세대·대학생 세대에서 동성애 옹호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상당수 크리스천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시대적 조류에 함몰되어 동성애 포용에 앞장서는 상황이다. 무엇보다도 최근 몇 년간 한국의 신학교육 현장에서 일어난 일련의 친(親)동성애적 행보들은 문제의 심각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이러한 현실은 퀴어신학의 폐해로부터 신학도들(예비 성직자들)을 보호해야 할 당위적 과제와 책임을 한국교회에 부과한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한 신성을 모독하는 퀴어신학의 이단성에 대해 성경에 입각하여 단호한 입장표명과 대책 마련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예비 성직자들이 올바른 신학교육을 받음으로써 인류문명사적 위기에 봉착한 이 시대를 하나님의 진리의 영으로 선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이 땅의 미래 세대에게 인류가 반드시 사수해야 할 숭고한 가치체계와 건전한 문화유산, 무엇보다도 신실한 신앙전통을 물려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이 올바른 가치관과 신앙관을 가진 건전한 사회인이자 신실한 신앙인으로 자라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 상황 속에서 한국교회는 동성애를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퀴어신학을 교리적으로 연구하여 이단으로 정죄하고 신학계를 새롭게 정화하는 갱신에 힘써야 할 것이다.


    동성애에 대한 총체적 연구와 분명한 입장 표명
    여기서 동성애를 명약관화하게 정죄하는 성경의 관점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구약의 대표적 말씀인 레위기 18장과 20장에서 우리는 성(性)을 대하는 하나님 선민(選民)의 원칙, 곧 성별(性別) 간의 경계를 넘는 동성애를 엄격히 금지하고(18:22; 20:13) 혈연(血緣) 간의 경계를 넘는 근친상간을 혹독히 금지하고(18:6-18; 20:11-12,14,17,19-21) 생물 종(種)간의 경계를 넘는 수간을 철저히 금지한다는(18:23; 20:15-16) 사실을 발견한다. 특히 하나님께서 동성애를 ‘가증스럽게’(תועבה, toevah) 여기신다고 말씀하는데, 가증함은 인간 존재의 참된 정체성에 어긋나는 도덕적 범죄, 특히 신성모독적 악행에 사용되는 경향이다. 그러므로 동성애는 구약시대에 종교개혁을 단행할 때마다 개혁의 대상으로 간주(왕상 14:22-24; 15:11-12; 22:43-46; 왕하 23:7 etc.)되었는데, 이것은 동성애가 한 사회의 타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신약에서도 동성애를 죄악으로 규정하는 입장은 계속 견지되는데, 특히 로마서 1:26-27은 성경 전체에서 동성애에 대한 핵심적 가르침을 제시하면서 레즈비언 성관계도 언급하는 유일한 본문이다. 여기서 바울은 동성애로 인한 폐해를 ‘하나님의 보응’이라고 표현하면서 준엄한 심판의 말씀을 선포한다​13). 그는 모든 동성애가 피조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궁극적 의도와 목적, 곧 창조질서와 경륜을 거슬러 ‘역리로’(παρὰ φύσιν) 나아가는 죄악임을 명시하면서​14)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선언한다(고전 6:9). 단언하면, 구약과 동일하게 신약에서도 동성애를 가증한 죄로 금지하는 것은 세상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서의 삶의 정체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동성애를 죄악으로 정죄한 성경의 명령에 따라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제정되면서 가장 먼저 금지했던 것이 바로 동성애였는데, 당시 초대 교부들((대표적: 아우구스티누스)은 동성애를 하나님이 정하신 창조질서를 거스르는 범죄, ‘순리(φύσικὴ)에 역행하는 죄’일 뿐 아니라 부당한 행위로 간주하였다. 중세시대에 들어와 동성애에 대한 기독교 신학자들(대표적: 토마스 아퀴나스)의 입장은 더욱 공고해짐으로써, 동성애를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는 물론 자연에 어긋나는 죄악으로 정죄한 역사는 20세기 초반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20세기 중후반에 들어와 오랜 세월 음습한 역사 속에 숨어있던 동성애가 사회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일차적으로 기독교의 영적 권위 상실에 기인한다.

    그럼에도 동성애자들을 정치적으로 악용하여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기독교 창조질서 훼파를 통한 기독교 해체)하려는 동성애 옹호세력들의 궤계를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사실 장구한 세월 정신의학의 권위자들은 동성애를 심리적 성 정체성 장애(sexual identity disorder)로 인식해왔다. 그러다가 1973년 미국정신의학회(APA)가 정신질환 목록에서 동성애를 삭제하기로 결정했는데, 이것은 의학적 논의의 결과가 아니라, 동성애 옹호세력들이 정신의학과 의사들에게 가한 정치적 협박과 폭력으로 말미암은 일이었다​15). 바로 이것이 동성애에 대한 그동안의 역사적 판세를 역전시키는 순간이 됨은 물론, 추후 동성애에 대한 과학적·합리적 토론 자체를 차단시키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는데, 그 재앙적 결과는 진실에 대한 침묵의 강요와 정치적 악용이었다. 이로부터 17년 후 세계보건기구(WHO)가 APA의 결정을 채택함으로써, 오늘날에는 동성애가 ‘자연적 변이’로 간주되는, 그야말로 인류문명의 흑역사가 열리게 되었다.


    반신론적·무신론적 젠더 이데올로기에 대항해야 할 한국 신학계의 과제
    사태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반(反)동성애 사역에 있어서 평신도들이 순교를 각오하고 헌신하고 목회자들이 사생결단으로 동역하는 반면, 오히려 신학계가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현실이 너무나 유감스럽다. 평신도와 목회자는 신학자가 교리를 굳건히 세워 영적·사상적 전쟁을 견인해 주길 기대하지만,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현실이 너무나 부끄럽다. 현재 신학계는 동성애 옹호세력에 점령당한 교육현장에서 강자의 눈치를 보면서 포퓰리즘에 영합하거나, 신성모독 수준으로 음란하게 성경을 재해석하면서 동성애를 미화하는 퀴어신학에 예언자적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젠더 이데올로기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정부기관으로부터 연구비 수혜를 받거나, 글로벌 학술계에서 유명세를 타는 대세도 학자들의 신앙 양심을 마비시키는 사탄의 유혹이다.

    우리나라는 대다수 국민 정서가 동성애를 반대하고, 무엇보다 한국교회 평신도들의 귀중한 자산 때문에 서구교회와 달리 반드시 승리할 거라고 확신해왔지만, 신학계 때문에 전체 한국교회가 힘을 잃을 수도 있지 않을까 불길한 예감마저 든다. 이제라도 한국 신학계는 동성애와 퀴어신학, 젠더 이데올로기에 올바른 비판의 목소리를 냄으로써, “바로 이때를 위해 신학자로 부르심을 받은” 시대적 소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시대를 선도(先導)하는 책임을 짊어진 학자는 결코 사사롭게 학문 활동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 인류의 미래를 거시적으로 내다보는 혜안(慧眼)과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 살아있는 학자의 양심으로 시대 문명을 올바른 길로 이끌라고 그 직임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기독교 2천 년 역사에서 신학자 중에 순교자가 거의 전무한 상황 속에서 신학자들은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는 사도 바울의 경고를 뼈아프게 되새김으로써, 어떤 상황 속에서도 전적으로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신학도들(예비 성직자들)이 올바른 신학교육을 받음으로써, 인류 문명사적 위기에 봉착한 이 시대를 하나님의 진리의 영으로 선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땅의 다음 세대에게 인류가 반드시 사수해야 할 숭고한 가치체계와 건전한 문화유산, 무엇보다도 신실한 신앙전통을 물려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2020년 우리는 인류문명사가 대전환을 이루는 총체적 난국의 시대를 맞닥트리고 있다. 필자는 고뇌하던 청년시절 느꼈던 민족과 역사, 하나님 나라에 대한 부담감을 다시금 절감하면서 새해 벽두부터 하루에도 수차례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하나님, 이 위중한 역사적 국면에 왜 우리를 실존하게 하셨습니까? 왜 이 시대를 우리에게 맡기셨습니까?” 그때마다 깨닫는 것은, 이것이 우리가 감당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깨달은 이상 무조건 감당해야만 하는 숙명적 사명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을 우리 신앙양심이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오직 순종만이 우리가 할 일이라는 사실이다. 필자는 2천 년 교회사를 연구하면서 하나님의 역사가 좁은 길을 걸어가는 극소수의 깨어있는 이들에 의해 이루어져 왔음을 깊이 확신하고 있기에, 모든 기득권과 생명마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사명을 감당하는 마음이 무겁지만은 않다.

    현재 대한민국과 한국교회는 인류문명과 서구세계를 대신하여 영적·사상적 대리전(代理戰)을 치르는 중차대한 역사적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서구세계의 복음적 교회들은 한국교회가 패륜적 성혁명을 과연 막아낼 수 있을지 예의 주시하면서 중보기도하고 있다. 이들은 과거에 자신들이 한국에 선교사들을 보내서 기독교 복음을 전했지만, 이제는 역으로 한국교회가 무너진 서구교회들을 회복시켜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나라가 무방비로 젠더주의에 굴복 당했던 서구세계의 잘못된 전철을 지켜보면서 대책을 강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라 아니할 수 없다.
     


    영적·사상적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할 위중한 시대적 책임을 짊어진 한국교회는 의에 살고 의에 죽는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일념으로 헌신하는 가운데 각계각층의 전문가들과 연합하여 다각도로 치밀하게 대처함으로써, 대내적으론 퀴어신학을 이단으로 결의함으로 신학적 정체성을 지켜내는 한편으로, 대외적으론 동성혼 합법화를 막아냄으로 건강한 대한민국을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이다. 이처럼 한국교회가 반신론적·무신론적 젠더 이데올로기와 일대 전쟁을 치르면서 성결함을 덧입는 역사적 분수령을 맞이할 뿐만 아니라, 신앙의 본질을 회복함으로 개신교 전래 이래 맞닥트린 절체절명의 위기상황도 극복하게 되리라 확신한다.
     



    곽혜원 박사
    이화여대 사회학과를 졸업했고, 한세대와 장로회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으며, 독일 튀빙엔(T bingen)대학에서 조직신학 박사학위(Dr.thel.)를 받았다. 현재 21세기 교회와 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연구 공동체 <21세기교회와 신학 포럼>을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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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상원, “퀴어신학에 대한 분석과 비판”, <기독교동성애대책아카데미자료집>(2018.1st), 263.

    2) D. A. Helminiak/김강일 옮김, 『성서가 말하는 동성애: 신이 허락하고 인간이 금지한 사랑』(서울: 해울, 2003), 초판 & 밀레니엄 개정판 머리말; 182쪽. 

    3) T. W. Jennings/박성훈 옮김, 『예수가 사랑한 남자: 신약성서의 동성애 이야기』(서울: 동연, 2011), 24쪽.

    4) D. A. Helminiak, 『성서가 말하는 동성애』, 181-195쪽. 

    5) T. W. Jennings, 『예수가 사랑한 남자』, 46-72, 138-139쪽 

    6) 같은 책, 291-298쪽 

    7) E. Stuart, “Sacramental Flesh”, in: Queer Theology (MA: Blackwell, 2007), 66. 

    8) A. Hollywood, “Queering the Beguines: Mechhild of Magdeburg, Hadewijch of Anvers.”, in: Queer Theology, 78, 163. 

    9) G. Laughlin, “Omphalos”, in: Queer Theology, 125-126. 

    10) G. Ward, “There is no sexual difference”, in: Queer Theology, 78. 

    11) T. W. Jennings, 『예수가 사랑한 남자』, 354쪽 

    12) “노신학자의 예언 ‘기독교 없는 사회 올 것’”, 「한겨레」(2018.08.30), 

    13) 동성애 옹호세력은 바울이 오늘날과 같은 젠더 정체성(gender identity)에 무지하기 때문에 동성애를 비판했다고 주장하지만, 그가 동성애자를 구분하여 일부에게는 관대하고 일부에게는 가혹한 이중 잣대를 적용하지 않았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Cf. J. Boswell, Christianity, Social Tolerance and Homosexuality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0), 109ff. 

    14) S. J. Grenz/김대중 옮김, 『환영과 거절 사이에서: 동성애에 대한 복음주의의 응답』(서울: 새물결플러스, 2016), 88-99. 15) 미국정신의학회의 부당하고 불의한 결정은 수십년 간 논란이 됨으로써, 많은 의사들이 유감을 표명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된 역사적 배경에 대해 다음의 논문을 참조: J. Drescher, “Out of DSM(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Depathologizing Homosexuality”, Behavioral Sciences 5 (2015), 565-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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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웬만하면 콘돔써라.  

    얼마 전 경기도의 한 지역에서 중학교 1학년 남학생들을 대상으로 올바른 성윤리를 교육해달라는 학부모들의 요청을 받고 소그룹으로 성교육을 진행하면서 학생들에게 혹시 학교에 외부 강사가 방문해서 성교육을 할 때 오늘 배운 내용과 다른 이야기를 한다면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궁금한 점이 있다면 언제든 전화를 해도 좋다고 당부를 하였다. 일주일 후 학교에서 성교육을 받은 학생들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며칠 전 학교에 외부 강사가 와서 성교육을 했는데 역시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내용과는 너무 달랐다는 것이다. 어떤 내용을 교육받았는지 질문하자 남학생과 여학생을 분리하고 남학생들에게는 음경모형을 교탁위에 올려놓고 강사가 직접 콘돔착용 방법을 보여준 뒤 학생들에게 모두 나와서 한 번씩 콘돔을 모형에 착용해 보라고 시켰다는 것이다. 이런 성교육은 그날 1학년에서 3학년까지 모든 남학생들이 원하지 않아도 받아야만 했던 피임교육이었다면서 성교육 강사가 이상한 이야기를 했는데 “엄마가 원하지 않을 때 아빠가 엄마의 손을 강제로 잡는 것도 성폭력이다.”라고 했고 “에이즈는 더 이상 불치병이 아니며 약만 잘 먹으면 되는데 약값이 비싸서 문제지만 우리나라는 국가에서 모든 에이즈 환자에게 무료로 주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을 들었다고 한다. 중학교 1학년 남학생은 “학생에게 웬만하면 콘돔을 사용해라.”고 교육해도 되는지 필자에게 물었다. 학교에서 배운 내용이 틀렸다는 것을 알려주며 콘돔을 착용해보는 친구들의 반응이 어땠는지 묻자 미끌미끌한 느낌이 이상하다고 말하는 친구, 환호성을 지르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그날 학생들은 하루 종일 콘돔에 대한 이야기로 들떠있었고 며칠이 지났지만 자신도 아직 콘돔착용을 할 때의 느낌이 잊혀 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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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섹슈얼리티는 ‘성’의 완전 종합선물세트?

    초등학교 6학년 여학생은 학교에서 배운 성교육 내용 중 기억나는 것이 있는데 ‘섹슈얼리티’라고 했다. 섹슈얼리티는 단순한 것이 아닌데 어떻게 배웠는지 질문하자 성교육 강사가 와서 ‘섹슈얼리티는 성의 완전 종합선물세트’라고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경기도청소년성문화센터에서는 ‘섹슈얼리티란? 성도덕, 성과 관련된 제도나 관습, 이데올로기 다양한 성 심리나 문화, 성욕, 성정체성 등 넓은 의미의 성을 의미합니다. 즉 섹스, 젠더, 성별 혹 그와 관련된 모든 담론을 총칭하며 젠더, 성적지향, 성적취향을 모두 가리키는 말로 볼 수 있습니다.’ 고 소개하는 푯말을 벽에 부착시켜 학생들이 볼 수 있게 하였다. 생각해보니 이런 성교육을 하는 강사 입장에서는 학생들에게 가장 쉽게 섹슈얼리티를 이해시키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성교육의 급진적인 변화

    필자는 10년 동안 학교와 기관들을 방문하면서 성교육을 하고 있기에 그동안 얼마나 많은 변화가 일어났는지 알고 있다. 2년 전부터 성교육은 성평등교육이나 성인지, 성인권이라는 타이틀로 이루어진다. 보건선생님들은 지침이기 때문에 내용은 어떠하든 이런 제목으로 교육계획안을 제출해달라고 하시고 때로는 내용까지 지침에 따라달라고 요구하실 때도 있다. 간혹 크리스찬 선생님께서 아이들에게 올바른 성교육을 해달라고 요청하시는 경우에도 교감선생님, 교장선생님들의 결재가 안 되서 무산되기도 한다. 올해 낙태죄 헌법 불합치 판결이후 교육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담임 선생님들이 무슨 내용인지 복도에서 지켜보다가 낙태에 관련된 교육이 들어가면 갑자기 긴급회의를 하고 민감한 사항을 학생들에게 교육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항의를 해서 생명존중차원이라고 해명을 해야 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학교나 기관에서 성교육을 할 때는 교육계획안과 강사프로필, 교육내용 ppt가 모두 제출되어야 한다. 예전부터 기본적으로 제출하는 것들이었는데 놀랍게도 이제는 한 가지가 없어졌다. 부모에게 이런 내용으로 학생들에게 성교육이 진행된다고 알리는 유인물이다. 즉, 이제는 학부모에게 어떤 내용으로 성교육이 이루어지는지 유인물을 보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소그룹 성교육을 진행하며 학부모피드백 시간 자녀가 어떤 성교육을 받았는지 알고 있느냐는 질문에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모르고 있고 성교육의 내용이 어떠한지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 시대가 변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교육 내용의 변화도 받아들여야 하고 우리 아이만 모르면 이상하지 않느냐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도 해서 지나치게 빠른 피임교육이 가져올 폐해를 알리고 올바른 성윤리가 왜 중요한지 자녀와 학부모에게 다시 교육을 하고 있다.
     

    성교육의 독재국가

    우리나라는 성교육 강사 자격증이 국가 공인자격증이 아니어서 지금까지 대부분의 기관은 자체적으로 수료증을 발급하고 있고 필요하다면 기관에서 민간자격증 신청을 하고 심사를 거쳐 자격증을 발급해 왔다. 필자 역시 강사 양성과정을 하고 있기에 올해 초 성교육과 관련된 민간자격증을 신청하고 대기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여성가족부 산하기관인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외에는 성교육자격증을 발급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행정사를 통해서 여러 방면으로 알아보아도 보건복지부는 여성가족부에게 위임한 사항이라서 모른다고 하고 여성가족부도 같은 답변으로 일관하고 있다. 민간자격증정보서비스에서 성교육이나 성상담과 관련된 민간자격 검색을 하면 검색결과가 없는 것으로 나온다. 기존에 여러 기관이 성교육 강사자격증을 발급하고 있었음에도 이제는 검색자체가 안 되고 있는 현실이다. 의뢰를 맡은 행정사 역시 이런 내용을 전혀 모를 만큼 어떠한 공지도 없이 우리는 성교육의 독재국가에서 살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에서는 어떤 내용으로 교육을 하고 있는가.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메인 화면에 ‘성별다양성 카드뉴스’가 있고 ‘다양성이 경쟁력이다’고 알린다. 또한 기존 양성평등 콘텐츠 플랫폼을 올해 7월 7일부터 ‘젠더온 GenderON(genderon.kigepe.or.kr)’이라는 명칭의 사이트로 새롭게 오픈하였다. 젠더온 플랫폼은 유아에서 성인까지 생애주기별 성평등을 교육할 수 있도록 많은 자료들을 무료로 다운받을 수 있게 하였는데 유아기에도 성역할 고정관념이나 불평등을 없앨 수 있는 내용의 동영상이 있고, 아동기에는 ‘내 안에 젠더박스’, 청소년기를 클릭하면 ‘성차별이란 벽’, ‘너도 차별언어 들어봤어?’, ‘나는 남성우월주의자입니다’, ‘초등학생들의 혐오놀이’ 등 성평등 동영상 콘텐츠가 있다.
     

    이렇게 최근 우리나라 성교육 현장에서는 동성애를 포함한 다양한 성을 인정하도록 하고 성윤리가 빠진채 과도한 피임위주 교육을 하고 있다. 또 성역할의 벽을 허물기 위해 가정 내에서 누가 가장 많은 일을 하는지 체크하면서 아빠의 사회적 역할을 무시하는 내용을 가르치고 있는데 우리의 자녀들이 이렇게 편향된 교육을 받고 올바른 가치를 분별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앞으로 젠더이데올로기, 성평등 교육의 실태를 통해 우리나라에서 10대들을 대상으로 어떤 젠더 교육을 하고 있고, 어떤 문제들이 있는지 얘기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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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경화 소장
    다음세대교육연구소 소장, 카도쉬아카데미 공동대표, 성교육 경력10년, CTS 다음세대 크리스찬 성교육클럽(다크성클) 출연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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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우리 사회에는 결혼의 때를 한 없이 늦추고 미루는 젊은이들이 많다. 결혼 적령기가 따로 없다고 여기면서 싱글로서의 편안함과 경력 그리고 자아실현을 좇아 사는 것이 요즘의 추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생은 너무나 짧고 때와 기한이 있다. 봄이 있으면 여름이 있고, 가을이 있으면 겨울도 있다. 씨를 심을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으며, 청년의 때가 있으면 황혼의 때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생에 있어서 결혼도 중요한 삶의 과제이기에 결혼을 계획해야 한다. 결혼도 비전이다.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면서, 결혼도 함께 계획하라. 대략 이 나이 즈음에 결혼을 해서 가정을 시작하고 자손을 낳아 양육하겠다는 인생 플랜을 세워보라. 세상의 유행을 따라 남들이 그러니까 나도 덩달아 그렇게 살지 말기 바란다. 크리스천 젊은이들이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면서 살기를 꼭 부탁하고 싶다.

    인간은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며 가장 행복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물고기가 물속에 있어야 마음껏 자유롭게 생활할 있듯이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계획에 순종하며 최고의 삶을 있다. 결혼제도는 인간의 행복을 위해 창조주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복된 선물이다. 결혼은 오랜 인류 역사를 거쳐 오면서 우연히 생긴 진화의 산물이 결코 아니다. 결혼제도는 창조주의 신성한 아이디어이다. 결혼제도 속에는 하나님의 성품과 뜻이 담겨있다. 요즘 가정이 많이 깨어지면서 결혼에 대한 행복 기대치가 낮아지고 있지만, 결혼은 원래 그런 것이 아니다. 원래 결혼은 인간의 행복을 위한 제도이다. 창조주께서는 인간을 분명히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 그들이 연합하여 몸을 이루라고 하시며 그들에게 복을 주셨다.

    자녀들이 진리 가운데 바르고 행복하게 살면 부모의 마음이 없이 기쁘듯이, 인간이 행복한 결혼과 가정을 이루어갈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 역시 없이 기쁘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효도하는 마음으로 행복한 결혼 생활을 꾸려나가야 한다. 그런데 행복은 그냥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행복을 위해서는 노력이 투입되어야 한다. 행복은 배우며 만들어 가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값진 선물이다.

    그런데 혹시 지금 당신의 마음속에 결혼에 대해 부정적 생각이나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사랑에 대해서도 주저함이나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나의 부모님이 불행한 결혼생활을 했기에 결혼에 대해 주저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나 부모님이 설사 불행하셨어도, 나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있다. 혹은 과거의 만남의 실패로 인한 두려움이 있다면 그것도 버리기 바란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 안에서 언제나 새로운 출발이 가능하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신뢰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하나님 아버지, 행복한 결혼과 가정을 시작할 있도록 도와주실 믿습니다.라고 기도를 시작하라. 결혼을 향해 마음을 열어 보라. 결혼을 위해 폭넓은 만남을 시작하라. 지나치게 높은 이상형을 찾으려도 헤매지 말라.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없다. 자신도 완전하지 않다. 그러나 부족한 사람이 만나서 함께 의지하며 배우며 성장하는 것이 결혼이다. 완전한 사람은 없지만, 적어도 정직하고 성실하고 책임감이 있고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면 최고이다. 그리고 내가 먼저 그러한 사람으로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행복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다. 행복한 결혼도 애써 만들어 가는 것이다. 때로는 힘겹게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행복과 축복이 대가로 다가올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결혼을 공부해야 한다. 사랑도 배우고 훈련해야 한다. 사랑은 뜨거운 감정이 아니다. 성적인 욕구가 사랑이 아니다. 흔히 사랑해서 결혼한다고 하지만, 사랑이 그냥 서로 끌리는 감정만이라면 결혼은 위태롭다. 감정은 쉽게 변할 있기 때문이다. 결혼을 위해 준비해야 사랑은 책임감 있는 사랑이다.

    많은 사람이 결혼을 앞두고 혼수와 예단, 신혼여행과 야외촬영 등은 힘들게 준비하면서도 막상 결혼 살아가야 결혼생활에 대해서는 준비하지 않는 것을 본다. 실제의 결혼은 결혼식이 아니라 매일매일 살아가야 하는 지극히 현실적 삶이 결혼이다.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결혼생활 가운데 해야 역할들이 있다. 우리는 남편과 아내의 역할도 배우고 훈련해야 한다. 결혼 후에 겪게 예상문제에 대해서도 대비해야 한다. 열린 마음으로 결혼과 사랑에 대해 배우며 공부하는 자세를 갖는다면 행복한 결혼을 얼마든지 만들어 있다. 그렇다면 결혼은 무엇일까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한다.
     

      
     

    결혼은 등산길과 같다

    부부는 인생이라는 높은 산을 등반하는 동행자와도 같다. 사람이 넘어지고 주저앉았을 나머지 사람이 손을 잡아 일으킬 있다. 내가 지쳐 쓰러지면 당신이 곁에서 나를 일으켜 있으니 얼마나 든든한가. 붙잡아주고 감싸주고 용기를 북돋워 주는 당신이 있기에 가파르고 험한 길도 거뜬히 오를 있다. 부부가 팀이 되어 비바람 속에서도 손잡고 함께 걸어가는 인생길, 그것이 결혼의 여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정은 등산을 위한 베이스캠프와도 같다. 등반을 위해 준비하고 휴식하며 재충전하는 곳이 베이스캠프이다. 가정에서 충분한 안식을 취하고 다시 힘을 얻어 세상으로 힘차게 나아갈 있어야 한다. 그래서 가정은 충분히 안식하며 쉬는 곳이어야 한다. 또한 가정은 폭풍 속에서도 피난처가 되어야 한다. 바깥세상이 흉흉해도 가정은 진리로 무장된 피난처가 되어야 한다. 당신의 가정은 어떠한가? 당신은 어떤 배우자인가? 배우자나 예비 배우자에게 넉넉하고 편안한 피난처를 제공할 있는가? 흔들리지 않는 진리 위에 결혼과 가정을 지켜가고 있는가?


    결혼은 비전을 공유하고 함께 나아가는

    우리 모두는 인생의 의미와 목적이 있다. 특히 그리스도인이라면 돈을 많이 벌어서 편안한 삶을 살겠다는 목적보다는 높고 고상한 목표와 비전이 있어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부가 하나가 되려면 남편과 아내가 같은 비전과 목표를 공유해야 한다. 만일 사람이 가치관도 많이 다르고, 삶의 우선순위와 목적도 다르고, 비전도 상이하다면 결혼생활에서 갈등과 어려움을 겪게 것이다. 그래서 배우자를 선택할 때는 있으면 인생의 비전이 유사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론 사람이 가치관과 목표가 완전히 일치하기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그러나 결혼 전이라면 서로 인생의 꿈과 비전에 대해 마음을 열고 대화함으로써 어느 정도 유사한지를 살펴보아야 것이다. 혹은 지금은 서로 달라도 함께 좋은 책들을 읽으며, 성경공부 모임에도 함께 참석하면서, 서로의 삶의 목적을 조율해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 3:3) 말씀처럼 현재는 비전이 달라도, 하나님께서 일치시켜 주실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도 필요하다. 하나님은 연합과 일치를 기뻐하신다. 부부가 같은 비전으로 일치할 있다면, 그들은 팀이 되어 인생의 목적을 향해 일사불란하게 전진할 있을 것이다.

    <소명>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본적이 있다. 브라질의 바나와 원주민을 섬기는 강명관·심순주 선교사 부부의 감동적인 이야기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비전과 강한 사명감으로 만났기에 그들 부부의 연합과 친밀감은 어느 누구도 끼어들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비전 친밀감으로 그들은 외롭고 힘든 오지에서도 인내하며 선교의 사명을 넉넉히 감당하고 있었다.

     

    결혼 이전에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 또한 우리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라. 먹고 사는 것이 비전이 수는 없다. 하나님이 주신 고상하고 높은 비전, 이타적 비전을 찾아야 한다. 그러한 비전이 분명할수록 사소한 일로 갈등하는 시간은 줄어들 것이다. 결혼을 앞두고 있다면 반드시 예비 배우자와 함께 서로의 비전이 무엇인지를 함께 나눈 , 기도하는 데이트를 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아직 배우자를 만나지 못했다면

    아직 배필을 만나지 못했다면 먼저 자신의 대인관계를 점검해 보기 바란다. 혹시 대인관계나 사회생활의 폭이 쳇바퀴 돌듯이 제한되어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기 바란다. 혹은 내가 사람을 만나 교제하는 것을 어려워하거나 너무 소극적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지는 않은가? 평소에 건강한 교제권의 그룹에 속하는 것을 피하고 있지는 않은가?

    믿음의 배우자를 만나기 원한다면, 일단 마음의 빗장을 열어야 한다. 일부러 믿음의 공동체에 적극 참여할 믿음의 배우자를 만날 기회가 생긴다. 그래서 DTS(예수 제자 훈련 학교) 가고, 수련회도 가고, 은혜의 자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 직장에서도 신우회를 만들어서 믿음안에서 만남의 기회를 늘려가는 것이 좋다. 특히 봉사활동이나 단기선교 등을 함께 가면, 사람을 만나고 알게 되는 좋은 기회가 있다. 그러한 힘든 활동을 통해 어떤 사람의 평소에 알지 못하던 면들을 있어 유익하다. 공동체 속에서 사람의 인격과 인간관계를 관찰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원래 혼자 있는 것이 좋다 주장하는 사람에게 권한다. 우리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얻을 있다. 평소에 친구들과도 우정을 쌓고, 이성 친구에게도 마음을 열고 교제하며 폭넓은 인간관계를 갖기 바란다. 그리고 열린 마음으로 교제(fellowship) 자리에 적극 참여하기 바란다. 그러한 교제 속에서 자신의 인격과 인간관계를 가꾸어 가다 보면 뜻이 맞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다. 가만히 있으면서 누군가 동화처럼 나타나기를 기다리기는 것은 비현실적인 태도이다. 결혼과 배우자를 위해 기도하면서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만남의 기회에 적극 참여하기 바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먼저 자신의 인격과 성품을 가꾸고 변화시키며 발전시키는 진전이 필요하다. 나쁜 버릇은 빨리 버리고 좋은 습관과 성품을 개발한다면 좋은 배우자를 만날 기회는 더욱 것이다. 최고의 결혼준비는 나의 좋은 성품과 인격을 갖추는 일이다.

     

    경제적인 문제는 하나님께 맡기라

    결혼을 미루는 사람들 중에서 경제적으로 준비가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결혼에 있어 경제 문제는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갖추고 시작하려는 태도는 결혼을 어렵게 만든다. 광고나 TV 드라마를 보면 멋진 집과 자동차를 가진 남자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여자에게 멋지게 프러포즈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런 기준으로 보면 감히 결혼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가난해도 결혼할 있다. 갖추지 않아도 시작할 있다. 지금은 부족하지만 결혼해서 함께 힘을 합쳐 하나씩 일구어 가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나는 검소하게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여섯 개나 되는 아궁이에 밤에도 연탄을 갈아줘야 하고, 화장실에 가려면 멀리까지 가야 하는 그런 집에서 살았다. 집은 언제나 추웠고 더운 물도 연탄불에 데워야 했다. 그래도 그것이 고생스럽거나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플라스틱 하나를 구입해도 뿌듯하고 행복했다. 하나씩 살림살이를 늘려가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오히려 고단하던 신혼 시절이 지금은 우리의 추억 거리가 되어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한다.

    단칸방에서 가진 없이 시작하는 신혼부부 많다.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을 만나려는 것은 미성숙한 태도이다. 지나치게 세상적인 조건이나 물질적인 관점에서 사람을 고르지 말라. 물질의 풍요가 반드시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만고 진리의 법칙이다. 믿음 안에서 모험심을 가지라. 좋은 자동차나 안정된 집이 없어도 행복할 있다. 경제적으로 갖춘 뒤에 결혼하려면 너무 늦을 있다. 하나님을 의뢰하면서 일용할 양식과 필요는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신다는 믿음으로 시작하길 바란다. 그리고 현재 가난하더라도 하나님의 무한한 복을 제한하지 말라.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는 부요한 분이시며, 우리에게 번영을 주시는 분이시다. 우리 가정은 선한 부자 살겠다는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라. 선한 부자 부요하면서 부요한 것을 나누어 주는 사람을 의미한다.

    항상 자족하며 감사하며 사는 것을 습관화하라. 부정적 사고를 버리고 긍정적 사고와 말을 사용하라. 네가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28:2)라는 약속을 믿으라.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기로 작정하면, 모든 복이 어김없이 당신의 삶과 가정에 넘칠 것이다. 하나님을 나의 삶과 가정의 자리에 놓고 오직 그분만을 믿고 신뢰한다면 돈이나 재물은 우리 삶과 결혼생활에서 제자리를 찾게 것이다. 후에 일생을 마치면서 우리의 삶과 가정에게 부어주신 모든 복이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놀라운 고백이 당신의 속에 있기를 바란다.

    히스기야가 더미들에 대하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물으니 사독의 족속 대제사장 아사랴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백성이 예물을 여호와의 전에 드리기 시작함으로부터 우리가 만족하게 먹었으나 남은 것이 많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에게 복을 주셨음이라 남은 것이 이렇게 많이 쌓였나이다(대하 31:9­~10).

    결혼은 창조주가 주신 선물이다. 선물은 왜 주는가? 남을 위해 따로 구분하여 특별하게 주는 것이다. 결혼도 그렇다. 창조주가 인간에게 특별히 준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말하는 결혼의 모습과   문제점들만 받아들이지 말자. 성경을 통해 결혼을 이해하고 비전을 품어 보자. 결혼을 아직 하지 않은 청년들, 결혼을 한 부부들 모두 자녀에게 좋은 것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자. 좋으신 아버지를 신뢰함으로 결혼을 준비하고, 행복한 결혼 생활과 가정을 꾸리기를 축복한다.





    이기복 교수
    한동대학교 교수와 횃불트리니티 신학대학원 교수를 역임했으며, 저서로는 성경적 부모교실, 성경적 아내교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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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브렉시트: 유럽인권법원의 차별금지법과 젠더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
    문재인 정부의 국가인권위원회는 차별금지법의 명칭을 평등기본법으로 변경해서 2020년 9월 정기 국회에 상정해서 연내에 제정할 예정이라고 한다. 21세기 에드먼드 버크(보수주의 정치철학의 창시자)로 평가되는 영국의 대표적인 정치철학자 로저 스크러턴(Roger Scruton) 경은 2017년 중앙유럽대학(Central European University)에서 개최된 학술대회에서 유럽인권법원(The European Court of Human Rights)이 탑다운 방식으로 강제하는 차별금지법과 젠더 이데올로기 등은 "새로운 사회주의적 질서수립을 위해서 이루어진 개인의 주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라고 주장했다. 스크러턴 경은 유럽인권법원에서 말하는 차별금지개념은 다분히 사회주의적 개념으로서 1948년 유엔총회가 제정한 세계인권선언이나 1689년 제정된 영국의 권리장전(Bill of Rights)이나 영국의 보통법(common law) 그리고 미국의 독립선언문에는 등장하지 않는 새로운 법이라고 비판한다. 그는 영국의 법 전통은 갈등 해결을 위해서 바텀업(BottomUp: 상향식)방식으로 탄생한 법이지만, 프랑스 혁명에서 말하는 것은 탑다운(Top-down: 하향식)방식으로 법이 먼저 존재하고 그것을 강제하는 방식이라고 비판한다.


    로저 스크러턴은 1968년 프랑스 파리에서 발생한 68 학생 문화혁명의 반항과 폭력을 목격하면서 20세기에 다시금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전통의 르네상스를 일으키겠다고 결심했다고 고백한다. 스크러턴은 2016년 헝가리 과학원(Hungarian Academy of Sciences)이 함께 주최한 학술대회에서 유럽인권법원의 인권에 관한 결정들은 갈등의 원인이 되어서 영국인들은 유럽인권법원의 결정들에 저항하면서 브렉시트를 결단했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민족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탄생한 유럽연합이 민족국가(nation state)와 민족주의의 극복을 위해서 초민족국가적이고 사회주의적 지향을 한다고 비판한다. 나아가서 그는 유럽연합은 민족국가나 민족주의 자체를 극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특정한 민족국가와 민족주의, 2차 세계대전을 발생시킨 특정한 독일 민족주의, 곧 사회주의와 결합한 특정한 독일 민족주의(민족사회주의로서의 나치즘)의 폭력, 야만 그리고 폐해의 재발 방지를 위해 수립되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 특유의 민족주의(민족사회주의, 나치)의 극복을 위해서 탄생한 유럽연합이 민족국가 자체를 무시하면서 민족국가 위에서 탑다운 방식으로 강제하는 것을 오래된 자유민주주의 전통을 가진 영국인들은 인정할 수 없기에 최근 브렉시트를 했다고 주장한다. 2015년 독일 메르켈 총리의 수백만 명의 시리아 난민 수용, UNEU 라는 민족국가 상위기관에서 탑다운(Top-down: 하향식) 방식으로 강제되는 젠더 이데올로기와 차별금지법 등이 영국의 브렉시트에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그는 분석한다.


     

    서구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의 모태로서 영국은 수백년간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지만, 장 자크 루소의 낭만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 사상과 프랑스 혁명을 모델로 삼는 프랑스와 독일의 경우는 프랑스 혁명의 폭력과 야만 그리고 독일 나치(민족사회주의)의 야만 등 영국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정치적인 영역에서 불안정한 근대성을 보여 왔다. 현대의 두 사회주의 운동, 곧 히틀러와 독일 나치의 민족사회주의(Nationalsozialismus)과 칼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국제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 모두 독일에서 탄생했는데, 이는 독일 역사학자들이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독일만의 특유한 길(Deutscher Sonderweg)로서의 독일 반자유주의(Deutscher Antiliberalismus) 전통과 1920년대 독일의 대표적 경제학자였던 좀바르트(Werner Sombart)의 책 제목처럼 오래된 독일 사회주의(Deutscher Sozialismus) 전통으로부터 기인했다. 더 깊게 들어가면 이 독특한 독일 사회주의전통은 독일 프로이센 사회주의’(Oswald Spengler)로부터 시작된다. 독일 프로이센 이후로 헤겔, 니체, 하이데거, 칼 슈미트 등 독일을 대표하는 지식인들은 지속적으로 영미권의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전통을 비판하면서 독일 특유의 게르만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로 기울어지게 된다.

     

     

    차별금지법과 젠더 이데올로기의 사회주의적 법률혁명

     


     

    스크러턴 경은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영국 자유주의(보수주의) 전통에 서서 사회주의적 요소가 강한 독일과 프랑스가 주도하는 유럽연합(EU)과 유럽인권법원의 탑다운 방식(Top-down: 하향식)의 법률혁명 시도에 대해서 비판한다. 그는 법률혁명 시도의 대표적인 예로서 탑다운(Top-down: 하향식) 국가페미니즘인 젠더 이데올로기와 사회주의적 차별금지법을 지적한다. 로저 스크러턴은 사회주의적 차별금지법에 저항하면서 존 로크가 강조하는 개인의 주권과 자유의 재발견을 강조한다. 


    2012년 전 교황 베네딕토 16세도 젠더 이론이 인류학적 혁명으로서 결코 수용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2019611일 바티칸은 공식문서를 통해서 문화적이고 이데올로기적 혁명으로서의 젠더-이데올로기를 비판했다.” “‘차별금지’(Nichtdiskriminierung)'라는 유행하는 개념은 자주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은폐하고 있는데, 그 이데올로기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와 자연적 상호성을 부정하고 있다고 이 문서는 선포했다. 바티칸은 이 문서를 통해서 젠더 이데올로기가 학교와 교육기관에 도입되는 것에 대한 명백한 반대를 표명했다. 이 문서는 젠더-이데올로기가 상대주의에 의해서 추진되는 문화적이고 이데올로기적 혁명일뿐 아니라, “법률적 혁명”(juristischen Revolution)을 통해서 강제되고 있다고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다. 생물학적 성을 부정하고 남자와 여자 사이의 수많은 젠더들을 만들려고 하는 젠더 이데올로기는 창조질서를 부정할 뿐 아니라, “하나의 추상물로서의 인간”(Menschen als eine Art Abstraktion)을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바티칸 교육국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성정체성이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심리치료적 조치를 추천하고 있다​1).


    로저 스크러턴은 2016년 영국 런던에서 서구에서의 자유의 위기라는 주제로 개최된 학술대회에서도 유럽연합(EU)에서 수용하는 민족국가 위에서 탑다운 방식(Top-down: 하향식)으로 강제되는 젠더 이데올로기, 차별금지법,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 정치적 올바름(PC), 그리고 새롭게 사회병리학적으로 고안된 호모포비아와 이슬람포비아 개념에 대한 "미신적인 공포" 등을 비판적으로 분석했다. 스크러턴은 이러한 민족국가의 주권과 개인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차별금지법과 젠더 이데올로기와 같은 새로운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비판하면서 영국 브렉시트의 정당성을 정치철학적으로 변호한다.

     

    유럽인권법원의 인권법은 사회주의적 문화전쟁의 무기.

     영국 정치철학자 로저 스크러턴 경 뿐 아니라, 20년 동안 영국의 대표언론인 가디언(Guardian) 지 편집부 요직과 BBC의 정기적인 패널로 활동하면서 국제적으로도 저명한 여성 언론인 멜라니 필립스(Melanie Phillips)도 미국 로페어’(Lawfare) 재단에서 인권법을 납치하기”("Hijacking Human Rights Law")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인권법의 조작문제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면서 유럽연합의 유럽인권법원(European Court of Human Rights)에서 주장하는 인권법과 인권문화는 일종의 "문화전쟁을 위한 무기"로 전락했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가장 오래된 민주주의와 인권 전통을 가진 영국에서 인권개념은 이제 보통사람들에게 있어서 영국이라는 민족국가의 안전, 주권과 영토까지도 침해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고 분석한다. 또한 그녀는 유럽연합과 유럽인권법원에서 주장하는 새로운 인권개념은 잠재적 복수”(potential nemesis)로 변해버렸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새로운 인권개념이 서구문명을 보호하기 보다는 서구 자체를 비판하는 무기로 변해버렸다는 그녀는 지적한다. 즉 유럽인권법원에서 말하는 인권개념, 인권법, 인권문화, 차별금지법은 사회주의적 문화전쟁의 무기'무기화'(weaponization)되어 버렸다고 바르게 비판한 것이다.

     

    21세기에 약자, 희생자, 소수자, 주변인 그룹에 대한 정당하고 적정하고 적절한 기독교적-민주주의적 변호를 넘어서 새로운 사회주의적-전체주의적 방식으로 그 희생자됨(victimhood)을 과잉되게 무기화해서 정치적으로 오용하는 희생자 이데올로기(victim ideology)와 그 희생자 문화(victimhood culture)21세기 사회과학에서 새롭게 비판적으로 분석되고 성찰되고 있는 화두다. 사회주의적 지향이 강한 유럽인권법원의 차별금지법에서 주장하는 새로운 인권개념이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인권법을 문화전쟁의 무기무기화해서 정치적이고 사법적으로 탄압하고 박해하는 수단으로 쉽게 전락될 수 있는 위험을 가지고 있다고 그녀는 바르게 비판했다. 또한 그녀는 이 새로운 인권개념이 서구 가치들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이제는 성경처럼 되어버렸다고 비판한다. 게다가 그녀는 차별금지법과 인권법에 대한 유럽인권법원의 적극적인 판사들의 결정과 그 “"사법부 행동주의”(judicial activism)의 위험을 지적하면서 이 새로운 인권개념을 통해서 문화전쟁이 수행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차별금지법을 주장하는 주디스 버틀러의 전투적 평화주의의 문화전쟁

     젠더 이데올로기와 퀴어 이론의 여제사장으로 평가되는 주디스 버틀러는 2018년 기포드 강좌(Gifford Lectures)에서 서구 근대 정치학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토마스 홉스의 입장이 현대 정치경제학의 주류에 속하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홉스적인 견해를 비판하면서 장 자크 루소의 낭만주의에 기초해서 전투적 평화주의(militant pacificism)의 관점에서 차별금지법(anti-descrimination law)를 지지했다. 버틀러가 말하는 전투적 평화주의는 비폭력을 전투적으로 주장하는 모순적 측면이 존재한다. 이러한 모순적 입장은 장 자크 루소의 평화 상태로서의 자연 상태와 고상한 원시인을 주장하는 낭만주의 인류학에도 존재한다. 루소의 일견 낭만주의적이고 평화주의적인 담론들이 무정부주의로도 기울어졌지만 실제로 프랑스 혁명이 낳은 공포정치를 비롯해서 이후 공산주의, 사회주의, 마르크스주의의 전체주의와 파시즘으로도 기울어졌다. 버틀러는 토마스 홉스적인 전쟁상태로서의 자연 상태를 비판하면서도 전투적이고 문화전쟁적인 평화주의의 이름으로 권력쟁취를 위한 권력의지를 보이고 있다. 전쟁상태를 싫어하고 루소의 낭만주의적 신원시주의에서 말하는 평화 상태를 주장하는 것 같지만 포스트모던 철학이나 버틀러의 퀴어 이론도 20세기 버전의 문화전쟁상태에 있는 이론들이다. 포스트모더니즘과 퀴어 이론 등은 평화주의적인 수사학을 사용하지만 여전히 사회주의적 전복과 혁명을 주장하면서 권력투쟁과 문화전쟁을 벌이고 있다.

     

    영국 여성 언론인 멜라니 필립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차별금지법과 새로운 인권개념 등은 사회주의와 문화맑시즘을 위한 새로운 문화전쟁의 무기로 무기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차별금지법을 전투적이고 투쟁적인(agonistic) 평화주의의 이름으로 전투적으로 주장하는 주디스 버틀러의 입장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주디스 버틀러의 전투적이고 투쟁적인 평화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신루소주의는 최근 국내 좌파 진영에서 논의되고 있는 새로운 좌파 포퓰리즘“(Left populism)의 정치철학자 샹탈 무페가 강조하는 전투적이고, 투쟁적이고 그리고 문화전쟁적인 좌파 이론과도 맥을 같이 한다. 샹탈 무페는 독일 헌법학자 칼 슈미트가 정치적인 것의 본질로서 파악하는 친구의 적의 구분에 등장하는 투쟁적(agonistic) 차원을 재활성화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탑다운(Top-down: 하향식) 방식으로 강제되는 사회주의적-평등주의적 법률혁명 시도이기에, 여기에 내재된 문화전쟁(Kulturkampf)적인 차원에 대한 보다 비판적인 논의와 성찰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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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일권 박사
    르네 지라르 이론에 대한 학제적 연구 중심지로 성장한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대학교 조직신학부 기독교 사회론(Christliche Gesellschaftslehre) 분야에서 신학박사(Dr. theol.) 학위를 받았다. 이후 인스부르크 대학교 인문학부의 박사 후기 연구자(postdoctoral research fellow) 과정에서 학제적 연구프로젝트 『세계질서-폭력-종교』 (Weltordnung-Gewalt-Religion), 『정치-종교-예술:갈등과 커뮤니케이션』에서 연구하고 귀국했다. 지라르를 직접 2번 만나 학문적 대화를 나누었다. 한동대학교와 숭실대학교 기독교학대학원 초빙교수로 가르쳤다. 국제 지라르 학회인 ‘폭력과 종교에 관한 콜로키움’(Colloquium on Violence and Religion)의 정회원으로서 르네 지라르와 불교 연구에 있어서 국제적 인지도를가지고 있다. 최근에는 800여개의 외국논문이 정일권 박사의 연구를 인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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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htps://de.catholicnewsagency.com/story/vatikan-verurteilt-gender-ideologie-als-kulturelle-und-ideologische-revolution-4731

     

     

  • 68

    지난 논고에서는 젠더 이데올로기의 뿌리인 맑시즘과 네오 맑시즘을 간략히 살펴보았으며 네오 맑시즘의 줄기라고 볼 수 있는 후기구조주의를 간략하게 언급하였다. 이번 논고에서는 젠더 이데올로기의 직접적인 영향을 준 후기구조주의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구조주의

    후기구조주의는 20세기 초반 언어학을 기반으로 인간의 사고에 적용되는 공통적인 구조나 체계를 분석하는 구조주의 이론에서 파생된 이론으로서 프랑스를 기점으로 6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원래 순수학문적인 성격을 가진 구조주의는 그동안 전통 언어학의 틀을 완전히 뒤집는 획기적인 대안적 이론으로서 등장했다. 언어가 모든 사고체계의 기본이라고 여기며 언어의 구조를 통해 인간의 지식체계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고자 한 구조주의 이론은 새로운 사고의 전환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고 여기에서 파생된 후기구조주의 이론은 언어학이라는 순수학문뿐 아니라 비학문적인 분야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구조주의는 언어가 인간의 사고체계를 이해하기 위한 근본 수단이라는 데서 시작한다. 즉 인간은 언어를 통해 사고하고 세상을 이해하기 때문에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에 내재된 규칙과 구조를 파악함으로써 인간의 사고체계를 판단하고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언어에 대한 접근방식은 근대 언어학의 창시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에 의해 시작되었다. 기존의 언어학자들이 통시적인 언어의 역사, 시대의 흐름에 따른 언어의 변화에 대한 연구에 집중했다면 소쉬르는 언어의 공시적인 접근, 즉 역사, 문화적 환경과 상관없이 언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기본 체계를 밝히고자 하였다. 대학 강의 자료를 묶어 출판한 그의 대표 저술인 『일반 언어학』(General Linguistics)에서 소쉬르는 언어의 체계를 정립했을 뿐 아니라 기호(sign)를 세분화해서 과학적이고 분석적인 연구를 시도했다. “구조화된 체계로서의 언어는 자기충족적인 하나의 완전체”(A language as a structured system . . . is . . . a self-contained whole)라는 소쉬르의 개념은 언어학 연구에 대한 새로운 장을 열어주었다.

     

    소쉬르는 언어를 랑그(langue)와 파롤(parole)로 구분한다. 랑그는 사회적으로 약속된 언어 체계를 의미하고 파롤은 실제 생활에서 개인이 발화하는 언어를 의미한다. 랑그는 전체적인 언어의 추상적인 구조로서 이를 확인하는 방법은 랑그라는 체계 속에서 사용되는 파롤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소쉬르에 의하면 파롤은 랑그에 속하는데 이를 풀어서 해석하자면 언어의 의미는 개인의 발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어체계 안에서, 즉 랑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고 개인은 그 규칙에 따라 의미를 전달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어떠한 사안에 대한 사고는 개인의 “주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의미체계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 결과 발화의 주체는 더 이상 말하고 이해하는 행위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발화의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언어라는 구조에 있게 된다. 이처럼 언어를 하나의 체계적인 구조로 이해하려는 접근 방식으로 인해 소쉬르를 구조주의 창시자라고 부르게 되었다.

     


     

    소쉬르의 언어에 대한 접근 중 또 다른 특징은 기호(sign)의 재해석이다. 그는 기호(sign)를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d)로 분리시켜 이해했다. 기표는 기호의 실제 형태, 단어, 소리, 이미지 등을 의미하며 기의는 단어, 혹은 이미지가 주는 추상적인 개념을 의미한다. 그리고 기호는 기표와 그에 상응하는 기의의 결합으로 나타난 결과물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어떠한 논리적이거나 자연스러운 연결점이 없고 자의적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무”라는 개념을 한글로는 “나무”라고 표기하지만 영어로는 “tree” 라고 표기한다. 이렇게 어떤 개념을 나타낼 때 그 개념에 일대일로 상응하는 표기는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개념과 그를 지칭하는 기표 사이에는 어떠한 내재적인 연결고리가 없다. 그리고 소쉬르에 의하면 기호의 의미는 관계 속 “차이”에 의해서 생성된다는 것이다. , 기호의 의미는 그 자체의 고유한 어떤 내용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기표와 기표 간의 차이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열다”라는 단어는 그와 반대되는 “닫다”라는 단어와의 관계의 차이를 통해서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소쉬르의 언어학적 개념을 바탕으로 구조주의 개념이 정립되었다. 개념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언어의 의미는 자의적으로 발생된다. 소쉬르에 의하면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어떠한 필연적 연관성이 존재하지 않으며 전체 언어 체계 안에서 다른 낱말들과의 관계에 따라 의미가 임의적으로 생성된다. 두 번째, 사물의 의미는 그 사물 자체의 속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 간의 관계와 위치에 따라 결정되며 이 관계는 전체의 구조 안에서 확인되어야 한다. 세 번째, 어떠한 사안에 대한 사고는 개인이 주체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의미체계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 결과 발화의 주체는 더 이상 말하고 이해하는 행위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발화를 가능하게 하는 구조에 있게 된다. 이러한 언어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구조 중심적인 사고는 기존의 인간에 대한 이해에 새로운 장을 열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순수 언어학에서 파생된 구조주의적 사상은 인간의 주체에 대한 이해를 기본으로 하는 서구의 전통 기독교사상에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러는 가운데 시대적 변화에 맞춰 구조주의 안에서의 모순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후기()구조주의는 모든 면에서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서구의 전통 지식체계를 해체하기에 이르렀다.

     

    후기구조주의

    구조주의가 등장한 지 불과 몇 십 년이 채 되지 않은 1960년대에 구조주의자들 사이에서 스스로의 오류를 발견하며 그들의 이론을 비판 및 수정하며 기존의 구조주의 이론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했는데 이 시기에 수정·정립된 이론을 후기()구조주의라고 부른다. 구조주의의 언어이론을 바탕으로 후기구조주의는 언어의 자의성과 관계성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들은 기호의 생성과정 및 기표와 기의의 관계를 더 유동적이라고 보았을 뿐 아니라 기의의 존재를 거부한다. 그래서 어떠한 의미에 도달하기 위해서 기표 간의 끊임없는 차이로 인해 지속적으로 그 의미가 유보될 뿐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구조주의가 모든 구조 안에 존재하는 공통의 규칙을 찾고자 했다면 후기구조주의는 보편적인 규칙의 존재를 전면 부정한다. 기표 간의 차이가 지속적으로 다른 관계의 차이를 유발하며 그 과정에서 의미가 지속적으로 유보되는 상황 속에서 구조주의가 주장하는 공통의 법칙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주체로서 인간의 역할은 전무하다. 후기구조주의의 틀 속에서 인간은 의미생성 과정에 통로 역할을 할 뿐이다. 또한 구조주의가 관계 속의 차이에서 의미를 찾고자 했다면 후기구조주의는 이러한 관계가 이분법적인 사고(남성/여성, /, 논리/감정, 서양/동양, /백 등)를 만들어냈으며 이러한 이항대립은 결과적으로 지배적인 관계를 생성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남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성과의 관계를 통해 가능하며 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악을 인지할 때 가능한데 이는 결국 지배관계를 만들어냈고 이런 지배 이데올로기는 전통 서구사상의 기반이 되었다는 것이다. 서구 이데올로기가 이러한 이분법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그들은 이러한 개념을 만들어낸 기존의 지식체계, 즉 기독교 사상을 해체하고자 했다. 요컨대, 근대 언어학의 개념으로부터 시작된 후기구조주의에 의하면 언어의 원리를 바탕으로한 인간의 지식체계는 자의적이고 관계적이며 유동적이고 불안정하며 이로 인해 궁극적인 의미, 혹은 중심적인 진리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상을 함축시킨 개념이 있는데 후기구조주의의 대표주자인 자크 데리다(Jacque Derrida)남근로고스 중심주의”(phallogocentrism) 라는 개념이다. 데리다에 의하면 이 서구사회는 남성중심(phallus는 남근을 의미하는 용어로서 남성중심주의를 상징함)과 로고스 중심으로 유지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로고스는 말(word), 혹은 이성을 의미하는 용어일 뿐 아니라 기독교적인 개념(요한복음 1:1에서태초에 말씀이 계시니에서 말씀(로고스)은 예수님을 의미한다)이 내포되어 있는데 데리다는 이를 전체 부정하고자 한다​1)즉 데리다에 의하면 서구사회는 남성중심, 로고스 중심으로 이루어져왔으며 이러한 관습과 구조를 거부하고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학자 및 동성애자였던 미쉘 푸코(Michel Foucault)는 텍스트, 혹은 언어와 사회·역사와의 관계, 즉 “담론”의 형성과정과 이를 통한 사회적 권력의 작용을 풀어나가면서 근본적인 의미의 절대성을 부정했다. 어떤 담론, 혹은 당시의 진리에 대한 통시적 관점의 분석을 통해 의미는 고정된 불변의 것이 아니라 시대의 요구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푸코는 담론의 내용에 있지 않고 그 담론을 둘러싼 관계, 즉 지식을 규정하는 권력에 의해서 담론이 형성이 되는 과정에 관심을 두었다. 예를 들어 『광기와 문명: 이성의 시대의 광기의 역사』(Madness and Civilization: A History of Insanity in the Age of Reason)에서 푸코는 광기를 규정하는 담론이 어떻게 시대별로 달랐으며 이 담론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모종의 권력이 어떻게 작용했는지 살펴보았다. 푸코가 말하는 권력은 실제 권력의 소유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권력을 행사하는 실질적인 주체는 없으며 실체가 없는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정체불명의 힘이다.

     

    구조주의의 이론적 한계를 인지하여 후기구조주의로 전환한 언어학자이자 문학 비평가이며 동성애자였던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기호의 생성 과정에서 기표와 기의의 단일적 결합을 부정하였다. 다시 말해, 하나의 기표는 다양한 기의와 연결되어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The Death of the Author)에서 해석의 무한성을 강조하며 의미 생성의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던 저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은 의미가 없음을 이야기한다. 저자의 역할은 “이미 씌어진 문장들을 뒤섞거나 재결합하거나 재배치시키는 능력밖에 없는 사람들”이며 다양한 의미를 생성할 수 있는 존재는 독자라고 주장하며 “저자의 죽음”과 함께 “독자의 탄생”을 선포했다. 그리고 후기구조주의에 영향을 준 불가리아(당시 공산국가) 출신 언어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는 모든 사안은 텍스트를 통해서, 또한 텍스트 안에서만 이해 가능하다는 후기구조주의적 접근을 바탕으로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이라는 용어를 창안하고 이에 대한 이론을 정립하였다. 그녀에 의하면 모든 텍스트는 기존의 텍스트들 및 인용구들의 조각으로 이루어졌으며 한 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절대적인 본연의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텍스트의 기원을 전면 부정하였다.

     


    데리다를 비롯한 대다수의 후기구조주의자들은 근본적으로 서구사회를 지탱해온 지식체계와 가치체계를 부정하고 있는데 이러한 저변에는 억압적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을 바탕으로 하는 마르크스적 사상이 깔려있다. 참고로 후기구조주의자들이 모여 1960년에 창간한 문학잡지 『텔 켈』(Tel Quel; 1960-1982)은 좌편향된 정치성향을 보였으며 창간한 1960년부터 1971년에는 프랑스 공산당(French Communist Party)을 지지하였고 1974-1976년에는 중국의 마오이즘(마오쩌둥)이 사회적 억압구조를 농업사회에 적용한 이론)을 지지하며 실제 중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데리다는 인생 후반에 이상적인 공산주의사회를 주창했고(데리다 관련 자료 참고) 후기구조주의 언어학자인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당시 공산정권이었던 불가리아의 지원을 받아 프랑스에서 연구 및 교수활동을 했으며 당시 불가리아 스파이로 활동했다는 설도 있다. 이 설에 대해 크리스테바는 부인하지만 그녀의 성장배경을 보건대 맑시즘 사상에 영향을 받았음을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렇듯 그들의 맑시즘적 사고와 행태가 이론에 그대로 녹아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순수 언어학을 기반으로 한 구조주의 이론에서 시작하여 기존 서구질서의 해체를 촉구하는 후기구조주의 이론은 반사회, 반체제 혁명으로 불리는 프랑스의 68혁명과 맞물려 빠른 속도로 서구사회를 휩쓸기 시작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적 사회를 구축하였으며 더 나아가 젠더 이데올로기의 이론적 근간을 마련하여 현재까지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다음 논고에서는 프랑스 68혁명을 계기로 후기구조주의와 비슷한 시기에 시작된 페미니즘을 간략히 다루고 페미니즘과 후기구조주의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젠더 이론을 살펴보겠다.




    현숙경 교수
    Texas A&M 영문학 석,박사 졸업. 침례신학대학원 실용영어학과 교수/ 학과장. 바른인권여성연합 연구소 세움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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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데리다는 서구사회의 로고스 중심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Plato’s Pharmacy”(1981) )그에 의하면 그 동안 사람들은 말 (speech)을 함으로써 자신의 이성적 주체성을 인지한다고 여겼지만 사람들이 말을 주체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라는 구조 안에서 단지 의미 전달의 매개체 역할을 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에서는 로고스는 말,이성이라는 개념을 초월하여 예수님을 의미하기도 하며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 용어로 사용되는데 데리다는 이 용어가 내포하는 모든 의미를 다 해체하고자 했다.이 의미의 해체는 곧 서구사회의 근간을 지탱해준 지식체계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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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한국 사회에 잠입(潛入)한 욕야카르타 원칙

    젠더전환(성전환, 性轉換)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논쟁거리 중의 하나이다. 젠더전환과 직접 관련한 법적 문제는 이름의 변경과 법적 性(legal sex)의 변경이다. 이 중 특히 논란이 되는 것은 후자로서, 현행 법체계의 실무상 가족관계등록부를 비롯한 공부(公簿)] 의 「성별정정」 문제로 제기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공부상 성별란에 기재된 사항(“남” 또는 “여”)의 변경 문제이다.





    현재 젠더(성)전환수술에 따른 성별 변경을 직접 규율하는 법률은 없다. 단지 2006년 9월 6일 대법원규칙(가족관계등록예규 제256호)으로 제정된 「성전환자의 성별정정허가신청사건 등 사무처리지침」(이하, “사무처리지침”)이 있을 따름이다. 위 사무처리지침 제정의 근거가 된 2006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결정 이래, 젠더전환수술에 따른 성별 변경을 허용하는 하급심의 결정들이 다수 축적되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사무처리지침의 허가요건에 대한 비판이 더해지면서 그 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와 관련하여 젠더전환수술이 반드시 필요한가, 그 수준은 어느 정도이어야 하는가, 특히 반대 성으로서 귀속감과 안정감을 느끼는 데 본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수준 이상으로(즉, 성별 기준에 대한 사회적 합의에 따라) 외부성기를 성형(변형)해야 하는가에 관하여 논쟁이 치열하게 이뤄지고 있다.

    이러한 논쟁을 더 가열시킨 것은 2020년 2월 21일 개정된 사무처리지침이다. 이에 의하면, 외부성기 변형수술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법원의 결정에 따라 성별 변경이 가능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개정된 사무처리지침이 사실상 개별 법원에게 성별 변경을 허용하는 재량을 크게 넓혀줌으로써 사법부 결정의 통일성과 일관성을 크게 해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오늘날 한국에서 젠더전환수술을 거치지 않은 채 본인의 선택에 따라 성별을 변경하거나 젠더전환자를 평등하게 대우할 것을 요구하는 배경에 욕야카르타 원칙(Yogyakarta Principles)이 있음은 이미 지난 호에 지적한 바와 같다.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등 젠더 퀴어의 권리선언으로 알려진 욕야카르타 원칙은 2006년 29개 원칙이 제시된 지 10년이 경과한 후, 2017년 11월에 9개 원칙을 추가하여 「욕야카르타 원칙 플러스 10」이라는 이름으로 그 보완판이 발표되었다.


    2017년 욕야카르타 원칙 플러스 10의 구성과 내용

    「욕야카르타 원칙 플러스 10」은 2006년에 제시된 성적 지향과 젠더 정체성 외에 ‘젠더 표현(gender expression)’과 ‘성징(성별 특징, sex characteristics)’을 보호대상으로 추가하였다. 플러스 10에 의하면, 젠더 표현은 옷차림·헤어스타일·액세서리·화장 등을 포함한 신체적 외관, 버릇, 말투, 행동양식, 이름 등으로 자신의 젠더를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젠더 표현은 자신의 젠더 정체성에 일치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본다. 즉 자신의 젠더 정체성에 관계없이 젠더 표현을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보호해달라는 것이다. 젠더 표현은 2006년 원칙에서 젠더 정체성의 개념에 포함되는 것으로 이해하였으나, 여기서는 별도의 보호대상으로 구별되고 있다. 한편 성징은 성기 그 밖의 성·생식기관, 염색체, 호르몬, 사춘기 이후에 나타나는 2차 성징을 포함하여 성과 관련한 개인의 신체적 특징을 의미한다. 플러스 10은 성징이 성적 지향, 젠더 정체성 그리고 젠더 표현과 동등하게 보호되어야 할 사항이라고 주장한다.

    플러스 10은 위의 네 가지와 관련한 9개 원칙과 111개의 국가의무를 새로이 제시하였다. 여기서 111개의 국가의무는 기존 29개 원칙에 대한 국가의무 56개와, 새로이 추가한 9개 원칙에 대한 국가의무 55개를 합친 것이다.

    아래 표는 2017년 욕야카르타 원칙 플러스 10에 추가된 9개 원칙을 보여준다.

    ▶ 2017년 욕야카르타 원칙 플러스 10에 추가된 9개 사항

    제30원칙: 국가 보호를 받을 권리
    「국가 보호를 받을 권리」는 성적 지향, 젠더 정체성, 젠더 표현 및 성징(이하, “성적 지향 등”)에 관계없이 누구나 공무원, 어떤 개인이나 단체로부터 받은 폭력, 차별이나 그 밖의 해악(이하, “폭력 등”)으로부터 국가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음을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는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을 막론하고, 성적 지향 등에 기인한 폭력 등으로부터 젠더 퀴어를 보호할 것을 국가의 의무로서 강조하고 있다.

    이와 관련한 국가의무를 매우 상세히 규정하고 있다. 폭력 등을 예방·조사·기소·처벌하고 일정한 구제수단을 마련할 것, 성적 지향 등에 기인한 차별·증오·폭력을 유발하는 일체의 혐오조장행위를 포함한 모든 형태의 폭력 등을 근절할 수 있는 적절하고 실효적인 조치를 취할 것, 폭력 등의 정도, 원인 및 결과에 관한 통계를 수집할 것, 폭력 등을 지속적으로 일으키는 태도·신념·관습·관행의 성격과 정도를 파악하고 이러한 해악을 근절하기 위해 취한 조치와 그 실효성을 보고할 것, 성적 지향 등에 대한 편견을 없애기 위한 교육과 홍보를 개발·실시·지원할 것, 성적 지향 등의 이슈와 관련하여 사법부 및 법 집행 공무원에게 감수성 훈련을 실시할 것, 강간·성적 학대·성희롱뿐 아니라 성적 지향 등에 기인한 어떠한 형태의 폭력이나 해악이든지 그러한 피해자를 위한 지원서비스를 마련할 것 등.

    이중에 특히 주목할 국가의무로 성적 지향 등에 기인한 차별·증오·폭력을 유발하는 혐오조장행위조차도 근절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할 것, 성적 지향 등에 대한 편견을 없애기 위한 교육과 홍보 프로그램을 개발·실시·지원할 것, 성적 지향 등의 이슈와 관련하여 사법부 및 법 집행 공무원에게 감수성 훈련을 실시할 것을 들 수 있다. 한마디로 ‘동성애 친화적 국가’를 만들라는 요구이다.
    제31원칙: 법적 인정을 받을 권리
    「법적 인정을 받을 권리」는 기존 제3원칙 「법 앞에서 인정받을 권리」와는 달리 주로 신분증명에 관한 권리이다. 여기서는 성적 지향 및 젠더 정체성 등을 드러내지 않고 신분을 법적으로 승인받을 권리와, 젠더 관련 정보를 담은 문서에서 이를 변경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규정하고 있다. 나아가 공적인 신분증에 합법적인 목적을 위해 법으로 요구되는 적합하고 합리적이고 필수적인 개인 정보만을 포함하되, 출생증명서·운전면허증·여권 등 신분증에서 성과 젠더 등록은 아예 폐지할 것을 국가의무로 규정하고 있다.

    한편 신분증에 성과 젠더를 여전히 기재하려고 한다면, 각자가 정한 젠더 정체성을 승인·확정해 주며 다양한 젠더 표기가 가능하도록 하고, 법적 성과 이름의 변경 요건으로서 의료적·심리적 치료, 정신의학적 진단, 연령의 상·하한선, 결혼 여부, 타인의 의견 등을 요구하지 말 것을 국가의무로 규정하고 있다. 이처럼 제31원칙은 젠더전환수술을 성별 변경의 요건으로 삼지 말고, 단지 각자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젠더를 결정하고 또한 변경할 수 있도록 할 것을 주장한다.
    제32원칙: 신체와 정신이 온전할 권리
    「신체와 정신이 온전할 권리」는 누구든지 성적 지향 등과 무관하게 심신의 온전성·자율성·자기결정권이 침해 받지 않아야 하고, 성적 지향 등으로 고문이나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취급이나 처벌을 받지 않아야 함을 규정한다. 또한 원칙적으로, 자발적이고 고지(告知)에 따른 사전 동의 없이 성징을 변경하는 불가역적이거나 외과적인 시술을 당하지 않아야 함을 규정하고 있다. 이는 특히 간성(間性)에 대한 의료적 조치를 거부하기 위함이다.
    제33원칙: 성적 지향, 젠더 정체성, 젠더 표현 또는 성징에 기인한 범죄화와 제재로부터의 자유
    「성적 지향 등에 기인한 범죄화와 제재로부터의 자유」는 성적 지향 등에 의하여 직·간접적으로 기인하는 범죄화(criminalization)와 모든 제재를 거부할 수 있음을 규정하고 있다. 이와 관련한 대표적인 국가의무는 다음과 같다. 명문 규정에 따르든, 아니면 일반적 처벌규정[예컨대 자연법칙에 반하는 행위(acts against nature)·도덕·공서양속(公序良俗) 등]의 적용에 의한 것이든 간에 어떠한 법규정에 의하여서도 성적 지향, 젠더 정체성이나 젠더 표현을 범죄화하거나 이에 대하여 일체의 제재를 부과하여서는 아니 된다. 또한 성매매·낙태·의도하지 않은 HIV 감염행위·간통 등의 범죄화를 포함하여, 성적 지향 등을 근거로 한 권리 및 자유와 충돌하는 모든 형태의 범죄화와 제재를 폐지하여야 한다. 이러한 국가의무에 따르면 동성 간 성행위는 물론이고, 당사자의 자발적이고 고지에 따른 사전 동의를 얻어 시술한 신체변형수술은 처벌대상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간단히 말해서, 이 원칙은 성적 지향 등에 근거한 일체의 범죄화와 제재를 거부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제34원칙: 궁핍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
    「궁핍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는 성적 지향 등과 연관한 모든 형태의 궁핍과 사회적 배제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지금까지 헌법이나 사회보장 관련 법률에서 장애·질병·노령 등의 사유로 겪게 되는 경제적 어려움으로부터 국가의 보호를 받을 권리를 보장해왔는데, 이 원칙은 더 나아가 성적 지향 등으로 겪을 수 있는 궁핍으로부터도 국가가 보호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성적 지향 등을 이유로 소외되는 사람들에 대하여도 국가가 사회적·경제적 포용에 힘쓸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제35원칙: 위생에 대한 권리
    「위생에 대한 권리」는 성적 지향 등에 근거한 차별을 포함하여 일체의 차별이 없이, 인간의 존엄성에 상응한 환경에서 적절하고 안전한 위생시설을 확실히 누릴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동성애자를 포함한 모든 젠더 퀴어들이 공중위생시설은 물론, 학교·직장·다중이용시설 등에서 적절한 위생시설을 차별 없이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학교, 사업체,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단체 등은 성적 지향 등에 차별 없이 이용할 수 있는 위생시설을 제공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제36원칙: 정보통신기술에 관한 인권을 향유할 권리
    「정보통신기술에 관한 인권을 향유할 권리」는 누구든지 정보통신기술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으며, 생명권·신체 및 정신의 온전성(integrity)·사생활의 보호·의견 및 표현의 자유·평화로운 집회 및 결사의 자유 등을 충분히 누릴 수 있도록 안전한 디지털 통신이 보장되어야 함을 규정하고 있다. 이뿐 아니라, 성적 지향 등을 근거로 한 온라인 상의 혐오표현·괴롭힘 등을 방지하거나 제거할 수 있도록 입법적·행정적·기술적 조치 등을 취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제37원칙: 진실에 대한 권리
    「진실에 대한 권리」는 성적 지향 등으로 인권 침해를 당한 피해자에게 사실·정황·발생 원인에 관한 진실을 알 권리가 있음을 규정하고 있다. 또한 사실에 대한 독립적이고 공정한 조사와 아울러 국제법에 의하여 승인된 모든 형태의 보상을 포함함을 규정하고 있다. 나아가 진실에 대한 권리는 공소시효에 구애 받지 아니하며, 이를 적용함에 있어서 개인의 권리일 뿐 아니라 과거 사건에 대한 진실을 알아야 하는 사회 전체의 권리라는 양 측면이 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원칙은 성적 지향 등에 기인한 피해자들을 위한 다양한 형태의 구제수단과, 성적 지향 등으로 말미암은 인권침해 사실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한 방법들을 규정하고 있다. 그 일례로, 성적 지향 등을 이유로 한 폭력의 희생자가 겪은 고통을 공공행사, 박물관이나 다른 사회적·문화적 활동을 통하여 기념할 것을 국가의무로 요구하고 있다.
    제38원칙: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권리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권리」는 누구든지 성적 지향 등과 관련한 문화·전통·언어·의식·축제를 행하고 보호하며 보전하고 부흥시킬 권리가 있으며, 이와 관련하여 문화적으로 중요한 장소를 보호할 권리가 있다고 규정한다. 또한 성적 지향 등에 따른 차별이 없이 어떠한 방법과 기술이 사용되든 간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문화적 다양성을 표현할 권리가 있음을 강력하고 표현하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모든 성적 지향 등과 관련하여 다양한 문화적 표현을 행할 수 있음을 규정하고 있다. 이 원칙은 젠더 퀴어들이 다양한 행사를 자유롭게 개최할 수 있는 근거로 활용될 것이다.


    더 강력해진 젠더 퀴어의 권리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2017년 「욕야카르타 원칙 플러스 10」은 2006년 「욕야카르타 원칙」보다 더 노골적으로 젠더 퀴어의 특권을 주장하고 있다. 후자가 일반인들의 인권을 염두에 두고 이를 젠더 퀴어에 적용할 것을 주장하였다면, 전자는 아예 젠더 퀴어를 염두에 두고 그들의 권익보장을 더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즉 차별금지 수준을 넘어서 국가적 차원의 보호와 지원을 청구하는 수준으로 나아간 것이다. 이러한 요구는 지난 10년 동안 국제적으로 젠더 퀴어의 목소리가 더욱 커진 것에 따른 자신감(?)의 표현으로 보인다.

    이러한 모습이 두드러지게 부각된 대표적인 것으로, 제30원칙 「국가 보호를 받을 권리」를 들 수 있다. 제30원칙은 성적 지향 등에 관계없이 누구든지 공무원, 어떤 개인이나 단체로부터 받은 폭력·차별이나 그 밖의 해악으로부터 국가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음을 규정하고 있다. 즉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을 막론하고, 성적 지향 등에 기인한 폭력·차별 그 밖의 해악으로부터 젠더 퀴어를 보호할 것을 국가의무로 매우 강조한 것이다.

    이처럼 「욕야카르타 원칙 플러스 10」은 현장에서 활동하는 젠더 퀴어 인권운동가들의 요구를 바탕으로 젠더 퀴어의 권리를 더욱 세밀하고 넓게 규정한 새로운 원칙을 제시하고 또한 기존의 원칙에 새로운 국가 의무를 추가하였다.

    이에 따라 앞으로 더 많은 요구들이 거세게 주장될 것이다. 예컨대, 간성(間性)인에 대하여 당사자의 동의에 의하지 않은 성기(性器) ‘교정’ 수술을 금지하는 것, 젠더 퀴어의 인권 보장을 위하여 인터넷 규제를 금지하는 것, 다양한 시설에 성중립 화장실을 요구하는 것, 젠더와 관련한 국가기관의 개인정보 기록을 최소화하고 쉽게 젠더를 변경할 수 있는 법제를 마련하는 것 등이 더욱 강하게 주장될 것이다.



    한국에서도 욕야카르타 원칙을 수용할 것인가?

    한국에서도 역시 이러한 모습이 나타날 것이다. 아니 일부는 이미 진행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욕야카르타 원칙은 법적으로 젠더 정체성을 인정받기 위한 요건으로 의료적 시술, 예컨대 젠더전환수술이나, 불임치료, 호르몬 치료 등이 강제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논리가 바로 우리나라 일부 판사들의 판단을 이끌고 있다. 트랜스남성과 관련하여, 외부성기가 반대의 성으로 변형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성별정정을 허용하는 결정이 2013년에 내려졌다. 2013년 11월 19일 서울서부지방법원은 남성의 외관과 확고한 정체성을 가지고 남성으로서 사회생활을 하며 가슴성형수술과 자궁적출 및 난소난관 절제수술을 받았으나 성기형성수술을 받지 못한 젠더전환자에 대하여 성별정정을 허가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인천지방법원 부천지원, 수원지방법원 평택지원, 울산지방법원 등에서 외부성기에 대한 외과적 수술을 시행하지 않은 트랜스남성에 대하여 성별란에 “여”로 기록된 것을 “남”으로 정정한 것을 허가하였다. 2013년 서울서부지방법원의 결정을 분석하면서, 법원의 결정에 따른 성별정정의 기준 즉, 외부성기 형성수술이 없는 상태에서도 성별정정신청이 허가되어야 한다는 입장이 욕야카르타 원칙에 보다 근접한 것이라고 주장한 견해가 욕야카르타 원칙에 동조하는 한국 사법부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조만간에 젠더전환수술을 거치지 않은 채 성별 변경을 허용하려고 하는 입법운동이 본격화될 것이다. 이뿐 아니라 젠더 퀴어의 법적 지위를 다양하게 보호하려는 입법운동이 계속 전개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욕야카르타 원칙을 따르려는 세력의 움직임이 한국 사회에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를 더욱 예리하게 지켜보고 대응책을 미리 세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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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선필 교수
    서울대에서 법학박사학위를취득하였고, 한국입법학회장,한국헌법학회 부회장, 한국공법학회 부회장을 역임하였다.현재 홍익대 법대 학장으로 봉직하면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자문위원, 국회 입법지원위원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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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미니즘 교육의 폐해
    크리스천 가정에서 급하게 교육과 상담문의가 와서 방문한 적이 있었다. 1남 1녀의 자녀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고 믿었던 부모는 최근 대학에 입학한 딸이 교양과목으로 페미니즘 수업을 들은 후 갑자기 헤어스타일을 숏커트로 바꾸고 아빠와 남동생을 대하는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고 하였다. 부모의 부탁으로 딸을 만나보니 고등학교 때 친척의 소개로 페미니스트들이 활동하는 블로그를 알게 되었고 대학에서 교수님을 통해 남성지배사회와 가부장제로 인한 억압으로 여성이 피해를 당하고 있으며 시대가 변해도 사회구조가 변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들었다고 하였다. 딸은 아버지에 대해서 얘기 하면서도 존칭을 사용하지 않고 듣기 불편할 정도로 경멸하는 듯한 언어를 사용하고 남동생에 대해서도 남매간의 사랑은 전혀 느낄 수 없는 냉담한 태도를 보이고, 동성애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동생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필자는 먼저는 가족간의 돌봄과 사랑에 대한 내용을 이야기 하며 지금까지 부모의 돌봄이 없었다면 내가 존재할 있었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하면서, 페미니즘의 역사와 가족의 해체가 주는 결과를 알려주자 다행히 딸은 대화를 이어나갔고 권장도서를 읽어보겠다고 하여 급진적인 페미니즘으로 인한 결과는 잠시 멈추게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믿음은 불확실하다고 하여 부모님께 지속적인 기도를 부탁하였다. 전부터 학교에 방문하여 성교육을 진행할 유독 여학생들은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급진적인 페미니즘에 빠져 남성혐오 발언을 하고 성평등을 외치며 진정한 자유는 투쟁을 통해 획득할 있다는 잘못된 지식을 펼치는 것을 목격하였다. 학교 화장실에는 남성혐오 문구를 적은 포스트잇을 붙여놓고 여성은 무조건 피해자라고 한다.

     

    표현의 자유가 빼앗기는 교육 현장

    이런 교육은 언제부터 시작되고 있는 것일까? 초등학교에서는 국가인권위원회 인권교육센터에 교육을 의뢰할 있고 선정된 학교는 인권강사들이 학교에 방문하여 학생 대상으로 보통 8회기 정도의 교육을 진행한다. 교육내용 중에는 가정에서 음식을 많이 하는 분은 누구인가요?, 가정에서 음식물쓰레기를 자주 버리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가정에서 설거지를 많이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가정에서 마트에 가서 장보기를 자주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요?등의 질문을 하고 학생들이 생각하며 적게 한다. 이런 내용의 질문지는 정답이 엄마라고 적게끔 되어있고 여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엄마는 희생당하고 있는 존재이며 나도 결혼을 하면 엄마처럼 마트 가기, 음식물쓰레기 버리기, 식사 준비하기 등의 볼일 없는 일을 하게 되기 때문에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주입시킨다. 또한, 여자로 태어난 것에 대한 불평등이 만연한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사회구조를 바꿔야 자유로운 세상이 된다고 여기게 된다. 문제는 이런 인권교육의 내용에서 아빠 역할에 대한 내용은 언급하지 않다는 것이다. ‘회사에서 야근을 많이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무거운 짐을 많이 들거나 나르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운전을 많이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아빠가 가정에서 하고 있는 역할의 중요성에 대한 교육을 받지 못한 자라는 자녀들은 자연스럽게 남성을 혐오하게 되고 필요 없는 존재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 인권교육센터 인권교육자료에는 혐오표현 표준교안 있는데 교안은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되는 인권교육 자료로 사용되고 있다. 교육자료에서 제공하는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지구촌혐오 내용에는 반이민정서 확대로 인해 반이슬람주의 확산과 트럼프와 혐오의 시대를 언급하며 트럼프 당선 이후 증오범죄가 증가하고 이주자와 무슬림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유럽에 전면화 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국사회의 혐오(2010 이후) 내용에는 이주민혐오, 동성애혐오, 혐오의 놀이화, 여성혐오, 난민혐오를 다루고 있으며 2010년대 들어 일부 보수개신교계의 반동성애운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고 이들은 동성애가 하나님의 질서에 반한다며 동성애 반대의 입장을 개진하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또한, 여성혐오는 2016 강남역 여성 살해사건 이후 여성혐오라는 말이 주목 받기 시작했으며 여성혐오는 여성에 대한 편견, 차별, 혐오, 폭력을 칭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고 한다. 난민혐오는 2018 제주도에 예멘 난민 500명이 입국했는데 때도 난민 수용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왔기에 혐오가 문제가 것이고 때부터 소수자 집단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자연스럽게 혐오라고 말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국사회의 혐오 확산의 등장 배경에 동성애자를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않다 응답이 아주 높은 비율로 나타났다며 이러한 태도가 혐오로 연결되는 것이라고 알리고 있다.

     

    두드러진 내용으로는 혐오표현 개념에서 파란 옷을 입었다 비난하는 것과 히잡을 썼다 비난하는 것은 효과가 전혀 다르다고 하면서 전자는 나쁘긴 하지만 혐오표현이 아니고 히잡을 썼다 비난하는 것은 기존의 차별과 편견을 더욱 강화하는 효과를 갖기 때문에 혐오표현이라고 가르친다. , 다수자에 대한 혐오표현은 성립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다수자란 남성, 백인, 비장애인, 이성애자 알려주고 있다.


    혐오표현이란 성별, 장애, 종교, 나이, 출신지역, 인종, 성적지향 등을 이유로 어떤 개인이나 집단에게 모욕, 비하, 멸시, 위협 또는 차별, 폭력 등의 선전과 선동을 함으로써 차별을 정당화, 조장, 강화하는 효과를 갖는 표현이라고 명시하는데 예시의 하나로써 동성애자는 HIV/AIDS 주범이라는 표현 모욕형 혐오표현이며 동성애 아웃 동성애로부터 우리아이를 지켜야 합니다. 것은 선동형 혐오표현이라고 한다.


    차별을 생산하는 혐오의 메커니즘에서 비가시화의 예로 퀴어축제 안하면 안되나 들면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축적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영향을 끼칠 있기 때문에 경계해야 한다고 한다. 혐오표현과 증오범죄에 대한 내용에서는 혐오표현은 편견에 기반한 차별적인 말을 하는 것인데 반해 증오범죄는 같은 이유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고 가중처벌을 받게 되며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살해하거나 폭행을 가한 것은 중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면서 우리사회에서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폭행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왜곡된 정보를 알려주고 있다. 혐오표현 피해사례에서는 청소년 성소수자가 갖는 두려움과 이성애자 남성으로 성소수자 지지활동을 하는 , 범성애자, 트랜스젠더의 예시를 들면서 지나치게 교육내용에 성과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혐오표현 규제 해외사례를 통해 성적지향에 대한 내용과 서울학생인권조례로 국내법과 제도를 설명하고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오바마 대통령이 했던 발언을 교육자료에 인용하며 정치 지도자들의 발언은 혐오표현의 위력을 삭감시키는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혐오표현 대응 방안으로 성소수자 현수막 훼손사건을 알리며 찢겨진 현수막을 새로 만들지 않고 반창고로 붙여서 복원한 것이 혐오표현에 대한 아주 훌륭한 대응이라고 알리고 있다.

     

    교육 내용이 전체적으로 지나치게 성소수자들을 피해자로 몰아가며, 객관적인 사실에 기반한 표현까지 혐오라는 프레임에 가두면서 표현 자체를 하지 못하게 몰아가고 있다. 학교에서 행해지는 인권 교육 안에는 사실에 기반한 생각조차 말하지 못하도록 하고, 학생들의 생각을 안에 가두고 있다.

     


    필자는 작년에 기관에서 성교육강사 양성과정을 진행하며 교육생들과 인권에 대한 토론을 적이 있었다. 현재 인권강사로 활동하는 몇몇 분이 교육을 들으면서 다수에게는 인권이 존재하지 않는다 발언을 해서 부득이 토론을 진행했다. 하지만 이미 위에 소개한 교육을 받고 활동하는 강사들의 사고는 바뀌지 않고 불편함을 호소했던 기억이 난다. 시대는 혐오와 차별이라는 말로 오히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으며 소수자라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용납되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제시하는 혐오표현 표준교안은 지나치게 성소수자에 대한 내용을 삽입하여 자라나는 다음세대들에게 잘못된 가치관을 주입하는 것은 아닌가!

     

    여성과 장애인과 성소수자를 피해자로 여기게 하는 인권교육내용은 앞으로 포괄적차별금지법의 제정과 함께 전국민을 대상으로 진행될 있고 올바른 가치관이 형성되지 못한 다음세대들은 분별하지 못하고 자신의 정체성이 크리스천임에도 혐오와 차별이라는 그물에서 벗어날 없을 것이다.



    최경화 소장
    다음세대교육연구소 소장, 카도쉬아카데미 공동대표, 성교육 경력10년, CTS 다음세대 크리스찬 성교육클럽(다크성클) 출연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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