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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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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연세대학교에서는 연세정신과 인권이라는 수업을 통한 젠더 교육 의무화 시도가 있었고, 이에 대해 학내외적으로 많은 논란과 논쟁이 빚어졌다. 

학교 학생인 필자는 피부로 이 상황을 느끼며 의무교육에 대한 찬성과 반대의 감정적이고 거센 대립구도를 보며 답답함과 안타까움을 가지게 되었다. 이 상황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들었던 생각은 모호하다는 것이었다. 특히 이 대립이 커지는 근원에는 정체성, 사랑, 혐오등 분명하게 정의되지 않은 채 모호하게 사용되는 개념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학교의 상황에서 몇 가지 문제점을 고민하게 되었는데

첫 번째 문제는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젠더와 동성애 이슈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아마 정체성일 것이다. <성별 정체성이 다양하며, 성적 지향 정체성이 다른 것이기 때문에 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즉, 차별적 행위>라는 주장이 많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도대체 정체성이 무엇이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일까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다. 

정체성의 국어사전적 의미는 변하지 아니하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성질이다. 그런데 성별에 대한, 성적 지향에 대한 것을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유전적 요소인가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1993년 처음 동성애가 유전이라고 사이언스지(Science)에 발표한 해머는(Hamer) 2005년에 다시  Xq28이 동성애와 연관성이 없다는 결과를 발표하면서 자신의 기존 연구결과를 번복했다. 동성애의 유전적 요소를 말한 1991년의 리베이의 주장은 2001년에 번복되었고, 1991년 베일리의 연구 또한 2000년 미국과 호주에서, 2010년 스웨덴에서 번복되었다. 일란성 쌍둥이의 동성애 일치비율은 대략 10%미만인데, 완벽하게 동일한 유전자를 갖고도 선천적, 후천적 영향을 합쳐 10%도 되지 않는다는 것은 동성애가 유전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는 주장의 모순을 보여준다. 그 외 동성애자가 유전적 결함에 의해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보기에는 빈도가 너무 높다는 1971년 L.L.Cavalli-Sforza와 W.F.Bodmer의 연구결과나, 자란 환경에 따라 동성애의 빈도가 다르다는 여러 설문조사 결과 등 동성애가 유전적 영향이 아님을 입증하는 과학적, 사회적 연구 결과들이 있다. 

유전적인게 아니라면, 결국 이는 각 사람이 처한 사회, 환경에 따라 타의적, 혹은 자의적 선택으로 인해 성적지향 및 성정체성의 혼란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주어지는 성질이라는 정체성은 무엇을 말하는걸까? 그것이 기호’, ’선호와 무슨차이가 있는걸까? 어디까지를 선호이자, 기호로, 어디까지를 정체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정체성이라는 단어를 함부로 써서 마치 남녀의 성별, 인종, 신체 구조 등과 같이 변하지 않는 본질적 요소들과 혼동시켜서는 안될 것이다.

 

두 번째는  사랑에 대한 단편적인 관점에 관한 것이다.

결국 성별과 성적지향의 정체성이라는 어설픈 기반 위에서 이에 대해 문제나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은 곧바로,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지 못하는 혐오주의자가 된다. 반면, ‘다 받아드리고 모두 포용하며 심지어 이를 제도화시키려는 사람들은 굉장히 마음이 넓고, 이해력이 많은 사람처럼 보여진다. 그것을 누군가는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이것보다 무책임한 말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을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한다는 것과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포용’(남을 너그럽게 감싸 주거나 받아들임) 하는 것은 다른 말이다. 사실 다른 편에서 생각해보면, 동성애나 수십개의 젠더 (남녀외에 에어젠더(성별없음), 데미젠더(특정 젠더 또는 젠더 자체를 부분적으로만 느낌). 트라이젠더(서로 다른 세가지 젠더를 갖고 있음), 젠더 플렉스(젠더의 강도와 때와 상황에 따라 달라짐), 젠더플루이드(성정체성이 고정적이지 않고 상황이나 심리 상태에 따라 물처럼 유동적으로 변함) )를 다른 사람이 갖던 가지지 않던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냥 인정하고, 모른척하면 편하다.

그러나 다수 동성애자가 여러 정신장애를 많이 나타낸다는 것은 동성애자로 구성된 미국 동성애 게이 및 레즈비전 의학회(GLMA)도 인정했으며, 동성애가 사회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고 차별이 없는 뉴질랜드나 네덜란드 같은 나라에서도 동성애자들이 주요 우울증, 불안장애, 물질남용, 자살, 성폭력등이 많다(Hass2014)는 논문결과도 많다. 이외에 많은 과학적 논문들이 성정체성과 성적지향에 혼동을 겪고 있는 이들의 정신적, 신체적 질병과 어려움에 대해서 밝혔다. (흐름상)

 

성적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이들이 정신적, 신체적으로 결국 어려워지고 망가지게 되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오히려 구조화시켜서 사회 전반적으로 이를 더 가중시키는 분위기를 만들어야하는가? 이게 사랑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가. 모든 것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여기는 생각의 틀 속에서 자신이 생각한 사랑이 진짜 사랑이 맞는지 돌아봐야 한다.

 

세번째는 언어적 모호함에 관한 것이다.

이번 학교 상황을 바라보며 또한 느낀 문제점은 젠더 교육 의무화 반대가 곧 동성애자 혐오로 귀결되는 논리였다. 그러나 말은 단어 하나만 바뀌어도 그 의미와 파급력이 굉장히 달라지기 때문에 한 가지 단어가 추가되거나 바뀐 두 문장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보자.

"성적지향, 성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가진 이들을 혐오하니?"

"젠더(다양한 성적지향, 성정체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됨)에 대해 의무적으로 교육하는 것을 반대하니?"

의 문장에 대한 대답에 대한 나의 대답은 

"아니, 혐오하지 않아. 그렇게 된 계기나 상황이 있었을거고, 힘들었을거야. 나도 끊기 어려운 게 있는걸같이 끊을 수 있도록 도전해보면 좋겠다." 

"응, 반대해. 다양한 성적지향, 성정체성을 학교차원에서 교육한다면, 이는 학교가 그것을 인정한다는 것을 전제하니까 모두가 이에 대한 위험의식이 사라지고 편향된 시각을 가지게 될 수 있어."

으로 질문에 대한 각각의 대답이 다르다. 그러나 학교에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보면 마치 젠더에대해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교육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곧 성적지향과 성정체성에 혼란이 있는 사람을 혐오하는 것처럼 당연시 여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둘의 의미는 분명히 다른데도 말이다.

이처럼 동성애와 다양한 성 정체성에 관한 대부분의 문제 상황들은동성애자, 양성애자들을 혐오하는가?’식의 한가지 명확한 질문이 아닌 다른 상황들을 동반한다. 예를 들어, 이를교육한다거나, ‘회칙’ ‘을 만든다거나 하는 다른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해당사람에 대한 생각과 그 행동을 일반화하기 위한 어떤제도적 장치에 대한 생각이 동일한 의미가 아닐 수 있다. 이는 의미가 다를뿐더러 초래하는 결과 또한 다르다. 따라서 모든 상황들을 하나로 묶어 일반화하는 오류를 주의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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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번째는 프레임 씌우기를 통한 무감각함에 관한 것이다.

더불어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해 보수진보라는 키워드로 프레임을 씌우는 것이 굉장한 무감각함을 동반하게 된다고 느꼈다.

동성애와 젠더이슈에 있어서는 마치 이를 지지하면 진보, 지지하지 않으면 보수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많은 정당들을 기반으로 한 정당정치, 민주주의 사회를 살고 있는 만큼 진보도 보수도 틀린 것이 아닌 다른 것이기 때문에 다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식의 논리와 교육과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자라왔다. 이 생각의 치명적 문제는 모든 생각과 주장과 의견들이 이 진보와 보수라는 프레임에 갇혀 옳고 그름의 혹은 타당하고 타당하지 않고의 영역을 말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는 데에 있다. 이는 단지 의견이 다를뿐이다라는 식의 생각으로 어떤 사안에 대한 심각성이나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잃어버리는 무감각의 상태로 빠지기 쉬워진다. 해당 문제가 가지는 객관적인 위험성이나 파급력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고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너무 보수적이야혹은 너무 진보적이야라는 말을 통해 정치적 싸움으로만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이는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하게 하는 눈가리개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글을 마무리하며, 사회의 많은 문제들, 특히 젠더와 동성애에 관한 문제는 모호함과의 싸움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말하고 있는 것들, 생각하는 것들이 과연 어떤 정의에서부터 나온 것인지, 그 정의는 맞는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생각해보지 않으면, 이 시대에서 의 생각은 없고, 시대의 생각만 남아 있게 될 것이다. 모든 이들이 이 모호함 속에서 치열하게 고민하며 의 생각을 찾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최지현 인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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