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젠더 기획특집 ]
젠더 이데올로기의 부산물, 친(親)동성애적 퀴어신학의 폐해와 신학계 갱신의 위급성
본문
퀴어신학의 태동과 기독교 신학계에 끼친 폐해
필자가 젠더 이데올로기(gender ideology)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면서 내린 결론은, 지난 원고들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젠더 이데올로기의 발흥으로 인류 문명사에 대재앙이 도래했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젠더 이데올로기가 음란하고 패역한 성혁명(sexual revolution)으로 이 세상을 성애화(性愛化)시킴으로써 타락과 패륜을 확산시키고, 이성애에 기반한 일부일처제(一夫一妻制)를 파괴하고 성소수자들(LGBTQIA)의 폴리 아모리(polyamory, 복수연애·다자성애)를 옹호함으로써 가정을 해체시키며,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정면으로 도전하는 반신론적·무신론적 시대사조로서 기독교계를 타락시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젠더 이데올로기가 특히 신학계에 끼친 심각한 폐해가 주목할 만한데, 그것은 바로 친(親)동성애적인 퀴어 이론(queer theory)을 발판으로 퀴어신학(queer theology)이라는 이단적인 신학 분파가 태동한 일이다. 퀴어신학은 모든 만물이 유전(流轉)한다고 주장하는 후기 현대적 생성의 철학에 근거하여 인간의 성(性)도 남성이나 여성으로 고정되지 않고, 양성이 자유롭게 유동(流動)한다는 사상의 기반 아래 절대적 진리를 해체시키는 해체주의적 세계관·인간관이 가세하여 만들어낸 신학 사조이다1).
특별히 퀴어신학은 낯설고 이상함을 뜻하는 ‘퀴어’(queer)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정통 신학에서 낯설고 이상한 것, 괴기하고 비정상적인 것으로 배제되어 변두리로 밀려났던 테마를 신학의 중심에 내세우고 이를 억압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신학적 근거를 마련하고자 한다. 여기서 낯설고 이상한 것은 동성애를 전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퀴어신학은 생소하고 괴이한 대상으로 문제시되어 왔던 동성애를 신학적으로 정당화하고, 비정상적인 동성혼을 정상화하는 데 종국적 목적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동성애 및 동성혼의 신학적 정당화와 기독교 전통의 부정
동성애 및 동성혼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퀴어신학자들은 보수주의 성경학자들의 문자주의적 성경해석을 통해 동성애가 죄악시되었다고 비판하면서 성경에 기록된 동성애를 역사 비평적으로 재해석한다. 퀴어신학의 대부이자 로마가톨릭 신부요, 철학자·심리학자인 다니엘 헬미니악(D. A. Helminiak)은 성경이 동성애를 단죄할 어떤 진정한 근거도 제시하지 않음으로써, 동성애에 관한 한 중립적 견해를 취한다고 시종일관 강변한다2).
시카고 신학교의 퀴어신학자 테오도르 제닝스(T. W. Jennings) 또한 동성애에 대한 기독교의 전통적 관점이 왜곡되었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그러면서 그는 다수의 성경 텍스트들이 동성애 관계와 행위를 긍정함은 물론 찬양까지 한다고 주장하면서 동성애라는 것이 저주도 아니고 범죄도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선물이라고 결론짓는다3). 심지어 동성과 가까워지려는 욕망이 축하받을 만한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이라는 퀴어신학자들의 주장도 나오는 상황이다.
퀴어신학자들은 동성애 및 동성혼이 죄악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격론을 벌이기도 한다. 특히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가 동성애를 한 번도 질책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성애가 죄악이 아니라고 역설한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주장인데, 일례로 만약 예수께서 언급하지 않은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단정한다면, 같은 논리로 우리는 그가 침묵했던 다른 불의한 행동(예: 근친상간)도 그에게 중요하지 않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인지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동성애가 심각한 죄악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가 동성애에 대해 논쟁하지 않은 것이 결코 아닌 것이다.
예수께서 동성애를 거론하지 않은 이유는 다음과 같이 추정할 수 있다: 1. 구약의 동성애 정죄에 대한 율법적 교리에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복음서에서 동성애에 관해 재차 언급하지 않은 것이며, 2. 이방 문화와 달리 성에 관해 매우 보수적이고 일찍이 동성애에 대해 엄격한 교육이 이뤄졌던 1세기 팔레스타인의 유대 문화에서 동성애가 큰 사회문제로 드러난 적이 없기 때문이며, 3.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고대 유대인 사회가 성에 대해 드러내놓고 말하기를 꺼리는 폐쇄적 사회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동성애와 같은 패역한 행위에 대해 직접적 언명을 피했다고 볼 수 있다.
퀴어신학자들의 성경인물에 대한 왜곡과 음란한 성경해석
퀴어신학자들은 동성애가 죄악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성경 안에 동성애자들이 많다고 유추하면서 그 사례를 구체적으로 열거한다. 그들이 기본 텍스트로 채택하는 헬미니악의 『성서가 말하는 동성애: 신이 허락하고 인간이 금지한 사랑』은 다윗과 요나단(삼상 18:1, 20:20; 삼하 1:26)의 우정을 위시하여 다윗과 사울(삼상 16:21)의 관계 역시 연인관계로 묘사한다(요나단-다윗-사울의 게이 삼각관계). 또한, 룻과 나오미(룻 4:16)의 관계를 문학작품에 최초로 등장한 레즈비언 로맨스로 추정하고, 다니엘과 환관장도 동성애 관계였을 가능성을 언급한다. 예수께 병든 하인을 고쳐달라고 청원했던 백부장과 종(마 8:5-13)의 관계 역시 동성애 관계라고 주장한다4).
퀴어신학자들은 성경의 거의 모든 인물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여 훨씬 더 많이 동성애에 개방적이었을 거라는 무모한 주장도 제기한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들이 참람하게도 하나님마저 동성애자로 만들어버린 사실이다. 테오도르 제닝스는 그의 저서 『예수가 사랑한 남자: 신약성서의 동성애 이야기』에서 예수와 어떤 ‘사랑받던 제자’(나사로·부자청년·안드레·요한 등으로 추정) 사이가 동성애 관계였을 개연성을 제기하면서 소위 ‘게이적 성서 읽기’를 시도한다. ‘사랑받던 제자’가 예수의 품에 안겨있는 육체적 친밀함에서 평범한 사제지간이 아닌 동성 간에 육체관계를 나누는 모습이 엿보인다는 것이다(요 13:21-26). 제닝스는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실 때 옷을 벗은 상태였고 제자들이 예수께 바짝 기대었던 것은 성애 관계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5),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은 예수가 여자의 역할을 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6).
지면에 싣기에 대단히 민망하지만, 사태를 냉정하게 직시하기 위해 반드시 지적해야 할 내용이 있다. 이는 곧 동정녀 마리아가 낳은 아기 예수가 남성으로부터 물질적 요소(남성성)를 전혀 물려받지 않고 여성인 마리아로부터만 자양분을 받았으므로, 예수의 몸이 ‘자웅동체’(雌雄同體)라는 주장이다. 이에 예수께서 상황에 따라 남성도 되었다가 여성도 되었다가 유동적으로 바뀌는데, 십자가상에서 창으로 옆구리가 찔린 상처에 대한 해석이 망령되기 이를 데 없다. 그들은 예수의 옆구리 상처를 여성의 몸으로 변화되신 자궁으로 해석하면서, 외부 상처는 여성 성기의 외음부이고, 피와 물은 애액이라는 것이다7). 또한, 로마가톨릭에서 행해지는 예수의 상처에 수녀들이 입맞추는 의식은 여성화되신 그리스도의 몸과 동성애적으로 구강 성교하는 의식이라는 것이다8).
퀴어신학자들은 하나님이 남근(男根)을 지닌 남신(男神)으로서 신자들과 성애(性愛)를 나누는 신이라는 참으로 해괴망측하기 이를 데 없는 신성모독적인 주장도 서슴지 않는다. 제라드 롤린(G. Laughlin)은 에스겔 1:27(“그 허리 아래의 모양도 불같아서 사방으로 광채가 나며...”)를 하나님의 성기를 우회적으로 표현한 본문으로 보며, 16:8(“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고...”)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남성들과 성관계한 것으로 해석한다9). 그뿐만 아니라 제라르 와드(G. Ward)는 요한복음 20:17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대화하고 그를 붙들려고 시도한 행동을 남성의 입장에 서신 예수님과 마리아가 이성애적 사랑을 주고받은 사건으로 보며, 27절에서 도마가 예수님의 옆구리 상처에 손을 넣는 사건을 여성의 입장에 서서 도마와 더불어 동성애적 사랑을 주고받은 사건으로 해석하기도 한다10).
우리는 퀴어신학자들의 성경해석을 보면서 그들이 과연 어떤 마음가짐으로 성경을 읽는지를 간파할 수 있다. 그들에게는 우정과 동성애 사이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아서 모든 친밀한 관계는 다 동성애 관계로 간주하는 경향이다. 음란의 프레임에 갇힌 상태에서 성경을 해석하니까 모든 것을 음란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는 의구심도 든다. 그런데 퀴어신학자들은 성경의 다수 인물들을 동성애자로 간주하는 한편으로, 명백히 동성애를 죄악으로 단정한 성경구절들에 대해선 왜곡된 해석이라고 강변하기도 한다. 구약과 신약에는 동성애를 직간접적으로 언급한 구절들(창 19:1-11; 레 18:22; 20:13; 신 23:17-18; 삿 19:16-30; 겔 16;48-50; 롬 1:24-27; 고전 6:9-10; 딤전 1:10; 유 1:7)이 나오는데, 퀴어신학자들은 그동안 보수주의 성경학자들이 이 구절들을 잘못 해석하면서 이성애만을 하나님의 창조질서로 바라보고(이성애 중심적) 동성애를 죄악으로 정죄(동성애 혐오적)해 왔다고 비판한다.
위의 성구들에 대해 퀴어신학자들이 재해석한 내용을 살펴보노라면, 대단히 어리석은 궤변과 비논리적인 억지주장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데, 그들은 성경 전체를 문맥에 따라 읽으면 충분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내용도 막무가내로 왜곡시키는 오류를 범한다. 특히 ‘소돔과 고모라 사건’(창 19장)이 명약관화하게 동성애와 관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전적으로 부정한다. 즉 이 사건이 이방인 약자를 대상으로 집단 강간을 저지른 불법을 지적한 것일 뿐만 아니라, 동성애자들에 대한 인류의 범죄를 정당화하는 데 악용되어왔다고 역공격하는 식이다. 과거엔 동성애자들이 자연적 순리에 위배되는 자신들의 부끄러운 행동을 은폐하기에 급급했지만, 오늘날엔 이미 공공연하게 드러난 동성애자들의 비윤리적 행태보다 이성애자들의 혐오가 훨씬 더 심각하다면서 비난의 화살을 오히려 이성애자들에게 돌림으로써 논점을 흐리기도 한다.
이성애에 기반한 전통적 결혼 및 가족질서에 대한 비판
퀴어신학자들은 동성애에 대한 이성애자들의 혐오를 비판하는 강도보다 훨씬 더 강한 어조로 이성애와 극심한 대립각을 세운다. 특히 그들은 성애와 생식(임신 및 출산)을 관련시키는 이성애 중심주의가 전통 기독교적 성윤리라는 괴물을 만들었다면서 이것이 동성애 혐오의 뿌리라고 맹렬하게 비난한다. 그러면서 퀴어신학자들은 동성애를 적극적으로 미화하는 만큼 이성애에 기반을 둔 결혼과 가족질서에 강한 적대감을 드러냄으로써 결혼과 가족적 가치에 근본적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특히 제닝스는 복음서에서 예수가 명백히 성적인 규범을 벗어난 일탈에 대해 크게 문제의식을 갖지 않았던 사람, 성적으로 부정한 행위에 충격을 받지 않고 책망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관대한 태도를 보였던 사람이라면서 성 일탈에 개의치 말고 살 것을 넌지시 암시하기도 한다11). 이처럼 제닝스의 결혼 및 가족적 가치를 폄하하고 성규범을 괘념치 않는 비윤리적인 방종은 성경에 기반한 기독교적 윤리관에 전적으로 배치되는데, 왜냐하면 성경이 독려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가족생활 중심의 성결한 삶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기독교계에서 제닝스의 신성모독적인 성경해석과 건전한 기독교 윤리를 위협하는 심각한 도전에 대해 별다른 문제 제기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기독교의 소멸’을 공공연하게 논하는 상황은 더이상 묵과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시사한다. 15차례나 방한한 바 있는 제닝스가 2018년 8월 한국에서 했던 강연(본래 감신대에서 강연이 예정되었으나 많은 반대로 평화교회연구소로 변경) 제목은 놀랍게도 “기독교 이후 신학”(Post-Christian Theology)이었다12). 그렇다면 제닝스는 왜 기독교 이후의 신학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일까?
20세기 중반 서구세계에서는 기독교가 쇠퇴할 거라는 예단 속에서 ‘신 죽음의 신학’(死神神學, Death of God Theology)이라는 극단적 신학사조가 출현하여 기독교 신앙을 위협했었다. 그런데 주창자는 다름 아닌 제닝스의 스승 토마스 알타이저(Th. Altizer)였다. 제닝스는 한때 존재했던 하나님이 더이상 실존하지 않기 때문에 기독교가 소멸할 세속 사회가 도래할 거라고 공언함으로써 그의 스승보다 한층 더 급진적으로 나아갔다. 거룩보다 쾌락, 성결보다 방종을 선택한 퀴어신학자들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족쇄처럼 부담스러운 존재이기에 이들이 ‘기독교가 사라질 그 이후’를 동경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수순인 듯하다.
퀴어신학에 대한 이단 결의의 당위성
사실상 퀴어신학은 신학이라 명명하기엔 너무나 부적절하고 치명적인 문제점을 내포한다. 퀴어신학은 창조질서로서의 양성(兩性) 질서를 주신 하나님의 섭리에 어긋나는 동성애에 천착함으로써 명백히 모든 시대의 인간을 향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탐구하는 기독교 신학의 본질에서 빗나가는 오류를 범한다. 또한 퀴어신학은 반(反)인륜적·비(非)도덕적일 뿐 아니라 괴기스럽고 이상한 성적 관행인 동성애를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데 주력함으로써 신학의 보편적 주제와 부합할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퀴어신학은 하나님의 거룩한 신성을 모독함으로써 성령 훼방죄에 상응하는 죄악을 범한다.
그동안 한국 기독교계에서는 퀴어신학의 이단성에 대한 학문적 연구와 논의가 지지부진했었다. 하지만 이제 퀴어신학의 이단 결의 문제는 더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는 위기 국면에 접어들었으므로 위중한 문제의식 속에서 퀴어신학의 이단성을 규명해야 할 것이다. 퀴어신학의 성경해석은 모든 이단의 성경해석 방식처럼 성경구절을 자의적이고 임의대로 자신들의 주장에 꿰어 맞추는데, 즉 자신들이 원하는 성경구절만 끌어내어 억지해석을 하는 행태는 퀴어신학이 다른 이단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특별히 퀴어신학이 다른 이단보다 죄질이 훨씬 더 악한 것은, 성결한 하나님의 말씀을 음란한 인간의 말로 치환시킬 뿐만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음란한 잡신으로 전락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게이로 가정하고 성경의 근본을 뿌리째 뒤흔드는 참람한 신학을 이단적이라고 정죄할 수 없다면, 과연 어떤 신학을 이단으로 정죄할 수 있으며 대관절 이단 판정 기준을 어떻게 정할 수 있겠는지 심각하게 고민할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와 관련된 핵심교리를 왜곡시키는 것이 바로 이단일진대, 퀴어신학은 이단으로 정죄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2006년 영국에서 발행된 『퀴어 성서 주석』(Queer Bible Commentary)의 한국어 번역이 종결되어 현재 출판을 앞두고 있는데, 이 주석은 성경 66권을 모두 동성애적 관점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성경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훼손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퀴어 주석 한글판이 보급되어 퀴어적 해석이 일반화되면, 성경적 윤리관에 대한 강한 충돌과 혼란으로 이어질 위험성이 매우 농후할 뿐만 아니라, 성경적 가치관을 지키려는 교회와 성도들이 사회적·문화적·제도적으로 공격당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더욱이 미래 세대·대학생 세대에서 동성애 옹호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상당수 크리스천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시대적 조류에 함몰되어 동성애 포용에 앞장서는 상황이다. 무엇보다도 최근 몇 년간 한국의 신학교육 현장에서 일어난 일련의 친(親)동성애적 행보들은 문제의 심각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이러한 현실은 퀴어신학의 폐해로부터 신학도들(예비 성직자들)을 보호해야 할 당위적 과제와 책임을 한국교회에 부과한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한 신성을 모독하는 퀴어신학의 이단성에 대해 성경에 입각하여 단호한 입장표명과 대책 마련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예비 성직자들이 올바른 신학교육을 받음으로써 인류문명사적 위기에 봉착한 이 시대를 하나님의 진리의 영으로 선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이 땅의 미래 세대에게 인류가 반드시 사수해야 할 숭고한 가치체계와 건전한 문화유산, 무엇보다도 신실한 신앙전통을 물려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이 올바른 가치관과 신앙관을 가진 건전한 사회인이자 신실한 신앙인으로 자라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 상황 속에서 한국교회는 동성애를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퀴어신학을 교리적으로 연구하여 이단으로 정죄하고 신학계를 새롭게 정화하는 갱신에 힘써야 할 것이다.
동성애에 대한 총체적 연구와 분명한 입장 표명
여기서 동성애를 명약관화하게 정죄하는 성경의 관점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구약의 대표적 말씀인 레위기 18장과 20장에서 우리는 성(性)을 대하는 하나님 선민(選民)의 원칙, 곧 성별(性別) 간의 경계를 넘는 동성애를 엄격히 금지하고(18:22; 20:13) 혈연(血緣) 간의 경계를 넘는 근친상간을 혹독히 금지하고(18:6-18; 20:11-12,14,17,19-21) 생물 종(種)간의 경계를 넘는 수간을 철저히 금지한다는(18:23; 20:15-16) 사실을 발견한다. 특히 하나님께서 동성애를 ‘가증스럽게’(תועבה, toevah) 여기신다고 말씀하는데, 가증함은 인간 존재의 참된 정체성에 어긋나는 도덕적 범죄, 특히 신성모독적 악행에 사용되는 경향이다. 그러므로 동성애는 구약시대에 종교개혁을 단행할 때마다 개혁의 대상으로 간주(왕상 14:22-24; 15:11-12; 22:43-46; 왕하 23:7 etc.)되었는데, 이것은 동성애가 한 사회의 타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신약에서도 동성애를 죄악으로 규정하는 입장은 계속 견지되는데, 특히 로마서 1:26-27은 성경 전체에서 동성애에 대한 핵심적 가르침을 제시하면서 레즈비언 성관계도 언급하는 유일한 본문이다. 여기서 바울은 동성애로 인한 폐해를 ‘하나님의 보응’이라고 표현하면서 준엄한 심판의 말씀을 선포한다13). 그는 모든 동성애가 피조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궁극적 의도와 목적, 곧 창조질서와 경륜을 거슬러 ‘역리로’(παρὰ φύσιν) 나아가는 죄악임을 명시하면서14)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선언한다(고전 6:9). 단언하면, 구약과 동일하게 신약에서도 동성애를 가증한 죄로 금지하는 것은 세상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서의 삶의 정체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동성애를 죄악으로 정죄한 성경의 명령에 따라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제정되면서 가장 먼저 금지했던 것이 바로 동성애였는데, 당시 초대 교부들((대표적: 아우구스티누스)은 동성애를 하나님이 정하신 창조질서를 거스르는 범죄, ‘순리(φύσικὴ)에 역행하는 죄’일 뿐 아니라 부당한 행위로 간주하였다. 중세시대에 들어와 동성애에 대한 기독교 신학자들(대표적: 토마스 아퀴나스)의 입장은 더욱 공고해짐으로써, 동성애를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는 물론 자연에 어긋나는 죄악으로 정죄한 역사는 20세기 초반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20세기 중후반에 들어와 오랜 세월 음습한 역사 속에 숨어있던 동성애가 사회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일차적으로 기독교의 영적 권위 상실에 기인한다.
그럼에도 동성애자들을 정치적으로 악용하여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기독교 창조질서 훼파를 통한 기독교 해체)하려는 동성애 옹호세력들의 궤계를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사실 장구한 세월 정신의학의 권위자들은 동성애를 심리적 성 정체성 장애(sexual identity disorder)로 인식해왔다. 그러다가 1973년 미국정신의학회(APA)가 정신질환 목록에서 동성애를 삭제하기로 결정했는데, 이것은 의학적 논의의 결과가 아니라, 동성애 옹호세력들이 정신의학과 의사들에게 가한 정치적 협박과 폭력으로 말미암은 일이었다15). 바로 이것이 동성애에 대한 그동안의 역사적 판세를 역전시키는 순간이 됨은 물론, 추후 동성애에 대한 과학적·합리적 토론 자체를 차단시키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는데, 그 재앙적 결과는 진실에 대한 침묵의 강요와 정치적 악용이었다. 이로부터 17년 후 세계보건기구(WHO)가 APA의 결정을 채택함으로써, 오늘날에는 동성애가 ‘자연적 변이’로 간주되는, 그야말로 인류문명의 흑역사가 열리게 되었다.
반신론적·무신론적 젠더 이데올로기에 대항해야 할 한국 신학계의 과제
사태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반(反)동성애 사역에 있어서 평신도들이 순교를 각오하고 헌신하고 목회자들이 사생결단으로 동역하는 반면, 오히려 신학계가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현실이 너무나 유감스럽다. 평신도와 목회자는 신학자가 교리를 굳건히 세워 영적·사상적 전쟁을 견인해 주길 기대하지만,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현실이 너무나 부끄럽다. 현재 신학계는 동성애 옹호세력에 점령당한 교육현장에서 강자의 눈치를 보면서 포퓰리즘에 영합하거나, 신성모독 수준으로 음란하게 성경을 재해석하면서 동성애를 미화하는 퀴어신학에 예언자적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젠더 이데올로기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정부기관으로부터 연구비 수혜를 받거나, 글로벌 학술계에서 유명세를 타는 대세도 학자들의 신앙 양심을 마비시키는 사탄의 유혹이다.
우리나라는 대다수 국민 정서가 동성애를 반대하고, 무엇보다 한국교회 평신도들의 귀중한 자산 때문에 서구교회와 달리 반드시 승리할 거라고 확신해왔지만, 신학계 때문에 전체 한국교회가 힘을 잃을 수도 있지 않을까 불길한 예감마저 든다. 이제라도 한국 신학계는 동성애와 퀴어신학, 젠더 이데올로기에 올바른 비판의 목소리를 냄으로써, “바로 이때를 위해 신학자로 부르심을 받은” 시대적 소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시대를 선도(先導)하는 책임을 짊어진 학자는 결코 사사롭게 학문 활동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 인류의 미래를 거시적으로 내다보는 혜안(慧眼)과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 살아있는 학자의 양심으로 시대 문명을 올바른 길로 이끌라고 그 직임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기독교 2천 년 역사에서 신학자 중에 순교자가 거의 전무한 상황 속에서 신학자들은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는 사도 바울의 경고를 뼈아프게 되새김으로써, 어떤 상황 속에서도 전적으로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신학도들(예비 성직자들)이 올바른 신학교육을 받음으로써, 인류 문명사적 위기에 봉착한 이 시대를 하나님의 진리의 영으로 선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땅의 다음 세대에게 인류가 반드시 사수해야 할 숭고한 가치체계와 건전한 문화유산, 무엇보다도 신실한 신앙전통을 물려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2020년 우리는 인류문명사가 대전환을 이루는 총체적 난국의 시대를 맞닥트리고 있다. 필자는 고뇌하던 청년시절 느꼈던 민족과 역사, 하나님 나라에 대한 부담감을 다시금 절감하면서 새해 벽두부터 하루에도 수차례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하나님, 이 위중한 역사적 국면에 왜 우리를 실존하게 하셨습니까? 왜 이 시대를 우리에게 맡기셨습니까?” 그때마다 깨닫는 것은, 이것이 우리가 감당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깨달은 이상 무조건 감당해야만 하는 숙명적 사명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을 우리 신앙양심이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오직 순종만이 우리가 할 일이라는 사실이다. 필자는 2천 년 교회사를 연구하면서 하나님의 역사가 좁은 길을 걸어가는 극소수의 깨어있는 이들에 의해 이루어져 왔음을 깊이 확신하고 있기에, 모든 기득권과 생명마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사명을 감당하는 마음이 무겁지만은 않다.
현재 대한민국과 한국교회는 인류문명과 서구세계를 대신하여 영적·사상적 대리전(代理戰)을 치르는 중차대한 역사적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서구세계의 복음적 교회들은 한국교회가 패륜적 성혁명을 과연 막아낼 수 있을지 예의 주시하면서 중보기도하고 있다. 이들은 과거에 자신들이 한국에 선교사들을 보내서 기독교 복음을 전했지만, 이제는 역으로 한국교회가 무너진 서구교회들을 회복시켜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나라가 무방비로 젠더주의에 굴복 당했던 서구세계의 잘못된 전철을 지켜보면서 대책을 강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라 아니할 수 없다.
영적·사상적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할 위중한 시대적 책임을 짊어진 한국교회는 의에 살고 의에 죽는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일념으로 헌신하는 가운데 각계각층의 전문가들과 연합하여 다각도로 치밀하게 대처함으로써, 대내적으론 퀴어신학을 이단으로 결의함으로 신학적 정체성을 지켜내는 한편으로, 대외적으론 동성혼 합법화를 막아냄으로 건강한 대한민국을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이다. 이처럼 한국교회가 반신론적·무신론적 젠더 이데올로기와 일대 전쟁을 치르면서 성결함을 덧입는 역사적 분수령을 맞이할 뿐만 아니라, 신앙의 본질을 회복함으로 개신교 전래 이래 맞닥트린 절체절명의 위기상황도 극복하게 되리라 확신한다.
1) 이상원, “퀴어신학에 대한 분석과 비판”, <기독교동성애대책아카데미자료집>(2018.1st), 263.
2) D. A. Helminiak/김강일 옮김, 『성서가 말하는 동성애: 신이 허락하고 인간이 금지한 사랑』(서울: 해울, 2003), 초판 & 밀레니엄 개정판 머리말; 182쪽.
3) T. W. Jennings/박성훈 옮김, 『예수가 사랑한 남자: 신약성서의 동성애 이야기』(서울: 동연, 2011), 24쪽.
4) D. A. Helminiak, 『성서가 말하는 동성애』, 181-195쪽.
5) T. W. Jennings, 『예수가 사랑한 남자』, 46-72, 138-139쪽
6) 같은 책, 291-298쪽
7) E. Stuart, “Sacramental Flesh”, in: Queer Theology (MA: Blackwell, 2007), 66.
8) A. Hollywood, “Queering the Beguines: Mechhild of Magdeburg, Hadewijch of Anvers.”, in: Queer Theology, 78, 163.
9) G. Laughlin, “Omphalos”, in: Queer Theology, 125-126.
10) G. Ward, “There is no sexual difference”, in: Queer Theology, 78.
11) T. W. Jennings, 『예수가 사랑한 남자』, 354쪽
12) “노신학자의 예언 ‘기독교 없는 사회 올 것’”, 「한겨레」(2018.08.30),
13) 동성애 옹호세력은 바울이 오늘날과 같은 젠더 정체성(gender identity)에 무지하기 때문에 동성애를 비판했다고 주장하지만, 그가 동성애자를 구분하여 일부에게는 관대하고 일부에게는 가혹한 이중 잣대를 적용하지 않았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Cf. J. Boswell, Christianity, Social Tolerance and Homosexuality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0), 109ff.
14) S. J. Grenz/김대중 옮김, 『환영과 거절 사이에서: 동성애에 대한 복음주의의 응답』(서울: 새물결플러스, 2016), 88-99. 15) 미국정신의학회의 부당하고 불의한 결정은 수십년 간 논란이 됨으로써, 많은 의사들이 유감을 표명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된 역사적 배경에 대해 다음의 논문을 참조: J. Drescher, “Out of DSM(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Depathologizing Homosexuality”, Behavioral Sciences 5 (2015), 565-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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