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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성애와 역사 ]
성혁명의 역사(1920년~194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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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 초기에 볼세비키는 이혼과 낙태를 법제화하였고, 여성으로 하여금 “결혼과 매춘 사이의 선택”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자유연애를 장려하였다. 여성들도 생산하는 일을 하게 하였다. 아이들을 복종적 공산주의자로 만들기 위해 부모 대신 탁아소나 학교에서 어린이 양육을 통제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금방 소련에서 “성적 반동”이 일어났다. 1918년에 소멸된 결혼법이 1930년 대 초 다시 돌아왔다. 다시 “의무적 가족“ 이 지원되기 시작하였고, “임신 중절”은 더욱 어려워졌고, 어린이 양육의 집단화는 중단되었고, 양육책임은 다시 부모의 것이 되었고, 어린이들의 자율성에 따른 “권위주의적 학교제도의 파괴”는 번복되었다. 젊은이들의 성적 자유와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의 “이성적 성적 각성”은“ 이데올로기적 금욕주의“에 의해 다시 억압받았다. 동성애가 제한 되기 시작하였다. 이를 목격한 라이히는 이러한 도덕적 과잉 조처들이 혁명을 위협한다고 분노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가 엥겔처럼 “사회의 성적 과정(sexual process)은 항상 문화적 과정의 핵심이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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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성길 교수
연세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로 재직하였고 250여 편의 논물을 저술하여 '국제신경정신약물학회 선구자상'을 받았다. 대한정신약물학회장,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초대 이사장, 서울 은평병원장을 역임하였고, 현재 한국성과학연구협회 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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