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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나의 어린 시절 - 가난과 배고픔
본문
프롤로그
하나님의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의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의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세기 1장 27-28절)
하나님은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미 나를 이천 년 전부터 나를 선택하셔서 나를 지으셨다고. 나는 복을 받고 받은 복을 전하기 위해 태어났으며, 나에게 이 땅에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고.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기억의 시작 - 어머니의 출산과 탁아소 생활
나는 함경북도 새별군의 가난한 가정에서 5녀 1남 중 넷째 딸로 태어났다.
나의 기억은 내가 5살 되던 해 막내 남동생이 태어나면서부터 시작한다. 나는 어린 나이에 깜짝 놀라는 일을 경험하였다. 엄마가 동생이 태어나기 며칠 전 나에게 동생이 생긴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아기가 어떻게 태어나는지를 몰라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데, 정말로 그 후 며칠이 지나지 않아 동생이 태어날 줄은 몰랐다.
엄마는 병원에 갈 수조차 없어 나 혼자 곁에 있는 방에서 혼자 동생을 낳으셨다. 별다른 반응 없이 동생을 기다리던 나는 창백한 얼굴로 온갖 힘을 다해 해산하는 엄마가 무섭게 느껴지기도 하였지만, 어린 눈에도 엄마가 너무도 아프고 힘들어 보였다. 온 동네가 떠나갈 정도의 울음소리로 터뜨리며 이 세상에 태어나는 동생을 보면서, 나는 엄마가 나 역시 이렇게 힘들게 낳으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때 당시 난 5살 난 어린 소녀였다. 철부지 어린 나이에 웃고 울고 맘대로 뛰어 놀아야 할 나이였지만 놀이터조차 제대로 없는 농촌의 가난한 가정의 어린 소녀는 엄마 아빠의 일손을 도와 동생을 돌보아야 했었다.
막내 남동생은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엄마가 모유가 안 나와 분유도 아닌 쌀가루로 암죽을 써서 먹이며 하루하루 연명했다. 이마저도 엄마가 매일 남동생을 돌볼 수 있었던 게 아니라, 출산휴가가 끝난 3개월 이후에는 다시 직장에 출근해야 했고 언니들은 학교에 다녀야 했기에, 나는 어린 동생과 함께 탁아소(어린이집)에 맡겨졌다.
나는 집에서도 동생을 돌봐야 했지만, 탁아소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아이들은 탁아소 마당에서라도 놀 수 있었지만, 나는 배고파 우는 남동생을 돌보아야 했기에 친구들과도 맘대로 놀 수가 없었다. 엄마의 젖을 한 창 먹어야 하는 남동생이 배고프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칠 때마다 손가락을 물려가며 잠을 재우고, 시간에 맞춰 지급되는 아기 암죽을 먹이며 하루하루 힘들게 보내는 ‘작은 엄마’의 삶이 나의 유년의 일상이었다.
늘 집안은 소란스러웠고 조용한 날이 없었다. 형제가 많으니 매일 같이 아웅다웅 싸움을 하며 자랐고 어린 나이였지만 집안일을 도맡아 엄마의 일손을 도왔다. 남동생을 돌보고 있으면 언니들과 꼭 다툼이 생겼지만, 엄마의 말 한마디면 불평 없이 순종하였다.
이렇게 남동생의 태어남이 나의 기억의 시작이었고, 가난의 배고픔이 연속되는 힘든 날의 시작이었다.
나의 학창시절과 김일성 주석의 죽음 - 고난의 행군의 시작
어느덧 시간이 흘러 나는 인민학교에 입학하였다. 집에서 학교까지 가기 위해서는 깊은 산골짜기에서부터 흘러 내려오는 송천 강을 건너야 했는데. 교통수단이 따로 없어 어린 걸음으로 30분 넘게 걸어서 통학하였다. 탁아소에서 아기 돌보는 일만 했다보니 나는 내 이름 세 글자도 쓸 수 없는 어린 문맹자였다. 처음 입학할 때는 모든 게 재미있고 신기했지만, 그것도 며칠 못 갔다. 남들이 다 쓸 줄 아는 자기 이름 세 글자도 모르는 나에게는 학교생활이 벅찼다.
입학한 이후에도 남동생을 돌보느라 제대로 공부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어떤 일에 굴복하지 않고 남자 아이들 만큼이나 씩씩했고, 공부 실력도 점차 향상되고 2학년에 올라가서는 조선 소년단에도 입단하였다.
그렇지만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필요한 돈과 물품을 요구했다. 교실 난로를 피우기 위해 학생들 스스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나무나 석탄을 자력으로 구해 와야 하는 등 공부에 매진해야 할 학생들이 학교 운영에 필요한 일을 계획하고 공급하는 데 어린 몸과 마음을 바쳐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를 비롯한 어린 학생들은 교실 내부와 외부를 꾸미기 위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모든 일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역 농촌의 노동력 지원에 동원되었고, 심지어 도로나 철도의 잡초를 뽑는 일에도 동원되었다.
특히 우리는 어려서부터 학생이 아니라 체제 유지를 위한 그릇된 주체사상의 노예로 살아가는 훈련을 받았다.
“내 운명의 주인은 나 자신이다. 내 운명을 개척할 책임도 나 자신에게 있다.”
이렇게 학교에서는 국가의 책임을 인민에게 돌리는 주체사상이라는 교묘한 책임 회피 사상을 학생들에게 반복하여 교육시켰다.
자력갱생 훈련은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우리는 봄·가을마다 농촌 지원을 나갔고, 추운 겨울이면 난롯불에 쓸 땔감을 구하러 산에 가서 등짐으로 나무를 해 와야 했다. 학교생활에 필요한 신발, 옷, 학용품 등 모든 필수품을 알아서 해결해야 했으며, 농촌지원을 나갈 때면 담임선생님의 식량까지 맡아야 했다. 그런데 학생들은 누가 챙겨주는 것으로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부터 열까지 도둑질을 하여 이를 해결하였다.
내가 중학교 3학년이었던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다. 온 나라는 큰 슬픔을 표하는 애도 기간을 선포했고 나 역시 학교 지시에 따라 제단에 꽃장식을 만들기 위해 친구들과 생화를 찾으러 온 산을 뒤지며 다녔다. 학교 교실마다 경쟁이라도 하듯 학생들의 애도의 소리를 높였다.
김일성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북한의 경제사정이 점차 어려워지더니, 1996년 무렵부터는 식량배급제가 중단되는 큰 변화가 찾아왔다. 여기에 김정일이 대를 이어 영도자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쌀밥에 고깃국으로 배불리 먹고사는 사회주의 국가의 꿈이 한층 멀어져 갔다.
배급중단은 당과 수령을 위해 충성해온 당원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가정을 먹여 살려야 하는 이들이 지속된 배급 중단으로 인해 당장 다음날 한 끼를 걱정해야 하는 시국까지 접어들었다.
우리 집 역시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어머니와 언니들도 배급을 못 받았을 뿐만 아니라, 트럭 운전을 하며 당에서 충성스러운 노동자로 인정받아온 아버지도 배급을 받지 못하게 되면서, 우리 집도 궁핍과 굶주림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가는 곳곳마다 시체들이 쌓여 가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이를 고난의 행군이라고 불렀다. 시체들이 눈앞에 널브러져 있어도, 오랜 시간 사상에 길들여져 온 나는 배급이 잠시 동안만 동안 끊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면서 우리 가족도 다른 선택을 해야만 했다. 어느 날 김책에서 어선을 탔던 사촌 오빠가 송어를 가지고 우리 집에 왔는데, 장사라곤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우리 가족이 서로 망설일 때, 내가 나서서 팔기로 했다.
나는 이 당시 학교에서 농촌지원을 나가야 했지만, 학업 대신 생존을 위해 장사의 길을 택한 것이었다. 오빠 부부는 김책에서 새별까지 날것으로 생선을 가지고 올 수 없어 소금으로 염을 해서 송어 300마리를 가져왔는데, 이 당시 농촌 사람들 역시 돈이 없어 송어 1마리당 옥수수 3킬로씩 받는 물물교환 형식으로 내다 팔았다.
막연했던 생각과는 달리 송어는 빠르게 팔려 나갔고 나는 장사를 하면서 재미를 느꼈다. 나는 이 당시 15살도 안 된 소녀였지만 고난의 행군으로 인하여 자본주의 생존방식을 조금씩 배워나갔다. 송어 300마리가 아주 쉽게 다 팔려 오빠 부부가 다시 가져온 물건을 내가 팔아 가족의 생존을 유지하였다.
그렇지만 학교에서는 내가 자본주의에 물들었다며 전교생이 모인 데서 사상투쟁대회를 하게 했다. 반성문도 여러 장 써서 제출하였고, 의자를 머리위로 들고 몇 시간씩 서서 처벌을 받던 기억도 난다. 나는 이렇게 학교에서 낙오자로 낙인찍히고 학급에서는 호상비판의 대상이 되었지만 스스로 부끄럽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런 소동을 겪고 나서도 장사가 재미있고 소질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떤 경우에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처하는 남다른 배짱이 나에게 있다는 게 스스로도 놀라웠다. 그래서 기회가 되면 더 큰 장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입대의 좌절과 나의 첫 직장 – 아버지의 생일상
나는 이렇게 학창시절을 꿈도 희망도 없이 마쳤다. 학교를 졸업한 많은 또래 친구들의 꿈은 군대에 가는 것이었다. 나 역시 졸업 후 큰 꿈과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가난한 가정에서 한 명이라도 입을 덜게 되면 가족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군에 입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저 군에 입대하면 군복 하나로 버틸 수 있고 먹여주기 때문에 입대를 결심했건만, 나는 신체검사에서 합격한 이후에도 뇌물을 바치지 못해 탈락 되었다. 결국 신체검사에서 불합격된 아이가 뇌물을 내고 내 자리에 들어가 입대하였다고 했다.
그래도 포기할 수가 없어 이번에는 돌격대에 지원했지만, 이마저도 탈락하였다. 돌이켜보면 여기에는 하나님의 나를 향한 계획이 있었다는 믿음이 있지만, 이 당시 나는 인생에서의 선택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너무나 억울하고 원통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나는 1998년 3월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직장인 양을 기르는 목장에 배치되었다. 이 당시 아버지는 목장의 원료 기지에서 일하고 큰언니는 양 방목공이였고, 둘째 언니는 선전 선동원으로 일하였다. 그렇지만, 셋째 언니는 폐결핵을 앓아 장기간 환자생활을 하였고, 어머니 역시 셋째 언니를 간호하다가 폐결핵이 전염되어 오랫동안 병치레를 하셨다. 아픈 어머니는 늘 아빠에게 미안하다고 노래처럼 말씀했던 기억이 난다. 아픈 것이 엄마의 잘못이 아닌데도 왜 엄마는 그토록 미안하다고만 했을까?
직장에 나가 일을 하더라도 배급이 없었기 때문에 온 가족이 막연히 배급을 기다리면서 한 직장에서 일 할 수 없었고, 집안에 환자가 두 명이나 있다 보니 나라도 식량을 받을 수 있는 데서 일하고 싶어서, 직장의 승인을 받지 않고 무작정 농장으로 나가서 농사일을 하였다. 이렇게 봄부터 일을 해서 가을이 되니 1년 치 식량 분배를 받을 수 있었고, 어머니께 조용히 말씀드려 처음으로 아빠의 생일상을 차려드리기로 하였다. 어머니의 긴 병치레로 생일을 잊고 사신 아버지였다.
진수성찬이 아니더라도 온 가족 여덟 식구가 다 같이 둘러앉아 따뜻한 밥 한 끼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한 축복이었다. 이 당시 부잣집도 아닌 우리 집이 누군가의 생일상을 마련했다는 것이 큰 기적이었고, 아빠는 사랑의 눈물을 흘리셨다. 회령과 청진과 같은 큰 도시의 역전에서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날이 갈수록 점점 많아진다는 고난의 행군의 소문이 우리 마을까지 퍼져 침묵 속에서 두려움이 커져만 가던 터라, 집안에서 서로 웃음지어 본지도 오래였다.
그래서 아버지를 위해 차린 소박한 생일상은 우리 가족으로서는 큰 기쁨이었고, 두려움 속에서도 삶에 대한 자신감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감당할 수 없는 비극과 고통은 역시나 우리 가정에도 서서히 몰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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